[ 서포터즈 ] 기고문-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유적지탐방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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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이 준 설

 

상해임시정부 성립의 배경

 

1910829,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의 전락과 여러 형태의 세금 수탈에 시달리게 되었고, 몰락한 민족자본가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심 또한 커져갔다. 이러한 국내사정은 파리강화회의에 우리 의 자주독립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추진된 3.1만세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3.1만세운동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민족적 노력이었으며,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의 회복, 즉 일제의 식민지 권력과 구조를 완전히 파괴 청산하고, 자주적이며 근대적인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당위성을 제공하였다.

3.1만세운동 이후 많은 청년들이 만주.연해주 지방의 무장투쟁단체에 가입하기 위해 망명하였고, 대중들의 정치 사회의식이 크게 높아져서 이후의 민족운동 전선에서 그들의 독자적 운동과 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1919411일 성립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로서 일본제국주의 구축(驅逐)을 위한 독립운동의 시작과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 성립을 가져왔기에 그 의의는 지대하다.

上海市(상해시) 盧灣區(노만구) 馬當路(마당로) 306() 4()

이 주소는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서포터즈 일원으로 2019318일부터 23일까지 중국 내 임시정부 현장 탐방지 가운데 첫 번째 방문지였던 상해 임시정부가 위치한 곳으로 현재 상해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이다. 이곳의 청사는 19267월부터 윤봉길 의거 직후인 19324월 말까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청사 중 하나이다.

 


상해에 첫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이유

 

19세기 상해는 열강들과의 교역의 창구를 열면서 상이한 행정체제가 공존하였다. 하나는 청이 관할하는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관할하는 조계지역이였다. 상해에 설치된 조계지역은 열강들이 중국관내로 세력을 넓히기 위한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조계지는 제국주의의 전진기지로서 역할인 반면 변화하는 정세로 인해 중국관내에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자 피난처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평청국군(太平天國軍)이 상해를 점령하자 중국인들은 이들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 조계로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들도 1910년 일본의 강제침탈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했다. 19193.1운동 이후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가 5백 명이 넘었고 1920년대 말에는 1천 명의 선을 유지하였다. 특히 프랑스 조계 지역에 다수의 한인이 거주하였다.

프랑스 조계 지역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지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을 지휘 · 통할해 나갈 중추기관으로의 역할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적 · 물적 자원을 공급받기 위해서 국내와 긴밀한 연계를 맺고자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와의 연계를 위해 통신 · 행정 연락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연통제의 시행과 교통국의 설치로 나타났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행정조직망이다. 이는 내무총장 안창호에 의해 추진되었고, 1919710일 국무원령 제1臨時聯通制가 공포되면서 출범하였다. 임시정부 내무부의 직할 하에 실시되던 임시연통제는 도에는 감독부를, 군에는 총감부, 면에는 사감부를 각각 두도록 하였다.

상해시기 임시정부는 이념적인 분화와 통합을 겪은 시기이도 했다. 사회주의 물결이 들어오던 시기에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므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이념의 차이가 생기고 이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만의 특징은 아니다. 대부분의 식민지가 좌우분화를 겪으면서 해방투쟁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분화와 갈등, 통합운동이 보편적으로 진행되었다. 임시정부도 그러한 이념적인 분화와 통합과정을 고스란히 겪고, 그 한 복판에 서 있기도 했다. 거기에 심하게 휘말리면서도 또한 적절한 대응방법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또한 상해시기는 다양한 방략이 추구된 시기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상황을 이용하여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국제회의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하려는 외교활동이 주축을 이루는 한편, 만주에서 양성된 독립군 조직이 전쟁을 준비하고 전투를 펼치는 것이 임시정부 수립기의 특징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이 기간 동안 7이나 청사를 옮기면서도 내정 · 교통 · 군사 · 외교 · 교육 · 문화 · 재정 · 사법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광복정책을 전개하며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상해임시정부의 변천사

 

이번 상해지역 탐방에서는 가보지 못했지만 상해의 첫 임시정부 탄생지는 옛날 김신부로(金神父路)’라고 불렸고, 지금의 서금2(瑞金2)’이다. 하지만 그 흔적은 서금2로 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사진으로만 남아 있으며, 임시정부 첫 번째 건물과 주소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관리처가 보유하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문제에 대해 비교적 대표성을 띠면서 체계를 갖춘 연구는 이현희 교수의 연구보고 정도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연구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처음 김신부로 22호에 설립되었다가, 1919417일 장안리 267로 이전하였고, 911일 이후에는 보창로 329호로 이전하였으며, 이후에는 하비로로, 그 후에는 또 다시 포석로로 이전하여 19261214일에는 마랑로 보경리 4호로 이전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의 독립기념관에서 파견한 학자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단이 상해에서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김신부로 22(19194). 장안리 267(19195~ 19199), 하비로 535(19195~ ?), 하비로 329(19207~ 19212), 하비로 460(1921), 포석로 신민리 14(1921~ 1926), 마랑로 보경리 4(1926~ 1932)” 라는 것이다.

한편 한시준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인 학자 허홍신과 손과지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서금 2로의 원래 문패가 김신부로 16호 임과 김신부로 22호가 현재 서금 250호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와 함께 의정원 청사 소재지 변천과 관련하여 한시준은 하비로(霞飛路) 460(1919417일 현재), 고내의로(高乃依路) 11(1919429일 현재), 하비로(보창로 309) (19199월 이전) 하비로 321(19199월 현재), 프랑스 조계 당국에 의한 임시정부 청사 폐쇄(19191017), 임시정부 기관의 분산(19202월 현재), 포석로(浦石路) 24(19214월 현재), 포백로(浦栢路) 명덕리(明德里) 26(1923813~ 19245월 상순), 수덕리(壽德里) (19245월 초순 현재), 서문로(西門路) 78(19245~ 1925120), 포석로(浦石路) 신민리(新民里) 14(1925120~ 19263), 백래니몽마랑로(白來尼夢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19263~ 1932)로 정리하고 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여러 곳을 전전하는 힘든 여정을 반복하였다.

한국 독립운동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을 계획했던 장소인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사무소 소재지 또한 여러 논란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창로(즉 하비로) 329호에 설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첫 여정을 담은 임시정부는 그 통합과정에서도 민주적인 절차를 견지하였고, 각국 정부로부터 공화정부 수립 인정을 받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위임통치론을 펼쳤던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자리에 앉아 임시정부 초기 많은 혼란을 가져왔고, 국무총리로서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동휘 선생이 소련으로부터 받은 자금의 유용 사건으로 인한 임정탈퇴는 임시정부의 무장 독립투쟁 방략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의 마지막 청사인 馬當路(마당로) 306() 4()로 막 이전하였을 때가 마침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던 시기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국의 상황이 급변하는 가운데 임시정부의 위기감도 높아졌다. 193110월 임시정부는 난국을 타개할 방략으로 의열단의 독립운동 방식을 채택했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이 한인애국단에 의해서 결행된 것이 바로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이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당시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국외 독립운동이 앞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했다.

 

 

中國共産黨 第1次 全國代表大會會址紀念館((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회지기념관)

: 上海市(상해시) 望志路(망지로)106108今 兴业路7678: 지금의 흥업로


 

이곳은 1921723일부터 31일까지 각지 공산주의 소조 대표들이 모여 중국 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를 소집하여 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음을 선포했던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인 장소다. 모택동, 하숙형, 동필무, 진담추, 왕진미, 등은명, 리달, 리한준, 장국도, 류인정, 진공박, 주불해와 포혜승 등 13(12인 설도 있음)이 전국 53명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대회에 출석하였고, 당의 임시강령 채택과 당의 사업기구 및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영경방(永慶坊) 10: 상해시(上海市) 황피남로(黃陂南路) 350() 일대


 

 

이곳은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김구 선생이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장소이다. 상해 신천지 거리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에서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은 전혀 없다. 영경방 10호는 본래 동농 김가진 선생이 아들 김의한 선생, 며느리 정정화 여사와 함께 살던 집이다. 그러다 19227, 김가진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김의한 선생이 김구 선생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김구 선생은 모친 곽낙원 여사, 아내 최준례 여사, 두 아들 인과 신을 데리고 영경방 10호에 거주했다. 최준례 여사는 이 집에서 둘째 아들 김신을 출산했지만, 낙상 사고로 늑막염이 발병했고 그로인해 폐병이 악화되어 1924년에 타계했다. 이후 모친 곽낙원 여사는 둘째 손자인 김신을 데리고 국내로 돌아갔고, 김구 선생은 첫째 김인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팔선교기독청년회관: 상해시 황포구 서장남로 123


 

이곳 팔선교기독청년회관은 1932428일 김구와 윤봉길이 훙커우 의거를 논의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천안독립기념관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소개에

“428일 정오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팔선교(八仙橋) 대세계(大世界)’ 근처인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만나 식사를 하면서 거사를 재차 논의했다. 오후에는 일본인 상점에 들러 시라카와 · 우에다(植田謙吉) 등의 사진과 행사장에 가지고 갈 일장기를 구입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에 김구가 다시 찾아와 이력서와 유서를 작성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김구를 위한 시와, 조국 청년들에게 남기는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시 각 1편을 작성하여 김구에게 전했다. (중략) 현재 중화기독교청년회관은 원형이 보존되어 있으며,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

라고 되어 있다.

현재 이곳에서 그날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날을 회상해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시간의 망각 속에 이 역사적인 공간도 들어가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된다.


 

 

 

노신공원(홍구공원): 상해시 홍구구(虹口區) 사천북로(四川北路) 2288

1932429일 오전 1145분경, 상해 홍구공원에서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의거는 독립운동사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역사적 사건이다. 이 의거 후 일제와의 전면전을 꺼려하던 국민당 정부도 우리나라와 임시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했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공동운명체라는 강력한 확인을 하게 되었다. 또한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독립운동 근거지 소멸 위협으로 인한 어려움과 일제의 침략에 맞서 중국을 포함한 여러 세력과의 연대가 필요했던 이 시기에 윤봉길의 의거는 새로운 수준으로 도약하는 독립운동의 발판이 되어준 의거라 평가할 수 있다.


     황포탄 의거지: 상해시 중산(中山) 동일로(東一路) 외탄(外灘) 288

 

황포탄 의거는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1922328일 상해의 황포탄 부두에서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할 목적으로 결행한 것이다.

192010월 조선군사령부 휘하의 일본군이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빌미로 간도를 침공하여 수많은 재만(在滿) 동포들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기획(간도불령선인 초토화계획)하고 총지휘한 다나카 기이치가 상부의 밀명을 받아 필리핀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싱가포르와 홍콩을 거쳐 상해에 들를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의열단으로서는 다나카를 처단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암살 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1922328일 오후 330, 상해 황포탄 세관부두에서 오성륜이 다나카에게 권총으로 2발을 쏘았으나 안타깝게도 미국인 신혼부부인 스나이더 부인이 피격을 당했다. 이에 다나카는 대기 중인 자동차로 다급하게 도망갔고, 김익상이 권총으로 2발을 쏘았으나 이번에는 모자만 관통했고, 달아나는 다나카의 자동차에 이종암이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되고 말았다.

의거 실패 후 피신하는 과정에서 김익상은 달려드는 중국 순경에게 신체가 아닌 허공으로 총을 쏘았으며, 이들이 쏜 총알에는 십자가를 새겨 다나카를 맞춘 탄환이 다시 그 몸을 관통하고 다른 죄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세심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나카 기이치 저격 도중 숨진 스나이더 부인과 의열단원들의 도주 중 일부 경찰의 상해로 인하여 의열단은 상해 거주 외국인들로 부터 인명피해에 대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에 김원봉 등 의열단 지도부는 자기들의 투쟁노선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석명할 필요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고, 그것이 19231월 신채호가 만든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으로 발표되는 배경이 되었다.


100주년 서포터즈 중국 임시정부 탐방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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