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포터즈 ] 시인 윤동주 북간도명동촌에서 후쿠오카형무소까지의 일생 그를 세상에 나오게한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 유고본보존가옥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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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흔적을 찾아서 광양에서 서울까지 길을 가다

시인 윤동주 북간도명동촌에서 후쿠오카형무소까지의 일생 그를 세상에 나오게한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 유고본보존가옥

-북간도 명동출생 시인윤동주와 광양의 인연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를 기억할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민족의 감정을 잔잔한 시로 표현한 윤동주이다.

 윤동주의 서시 유고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의 발길을 따라서 흔적을 찾아보았다.

지금 바로 갈 수 있는 곳 서울 누상동하숙집 그리고 윤동주 문학관, 광양망덕포구의 정병욱가옥을 찾았다.

영화 동주에서

탄생 북간도 명동촌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북간도)에서 태어났다.윤동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큰 마을 북간도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눈 여겨 볼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아명이다. 윤동주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해환(海煥)이었다. 아버지 윤영석은 자식들 이름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윤동주의 아우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렇게 그의 아명 속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유순하고 눈물 많은 소년이었다. 동기동창으로 윤동주 집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김약연의 조카로 윤동주와 외사촌간이었던 김정우, 그리고 문재린 목사의 아들인 문익환 등이 있었는데, 모두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송몽규는 1937년 4월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 문과 별과시험에 합격하여 윤동주와 다시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서울 연희전문에 입학하다

(윤동주와 정병욱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사진연희전문 시절 졸업을 앞둔 그 해 11월 윤동주는 그 때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또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이때부터 시인 윤동주와 정병욱의 인연은 시작이 되었다.

윤동주 하숙집을 찾아가다

종로구 누상동

사직단을 좌측으로 보면서 우측길을 갑나디

사직단

종로구옥인길 여기서 좌측길이다

누상어린이집

문학인의 골목 누상동

윤동주는 연희전문 입학 2년 만에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경복궁 서쪽 누상동은 지금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에 있다. 서촌에는 윤동주뿐 아니라 시인 이상과 화가 이중섭의 집도 있었다.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곳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화가 박노수와 이상범의 집도 서촌이었다. 지금 서촌에 문화예술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게 어쩌면 이런 전통을 잇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자는 경복궁역에 내려서 사직단방향 출구로 나오니 얼마 걷지 않아 사직단이 좌측에 보였다. 우측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좌측으로 배재대학교가 보이고 길가운데 통인시장입구 정자가 있는데 이곳의 표지판에는 “윤동주하숙집”이라는 표지판이 없어서 아쉬웠다. “누상어린이집” 방향으로 좌측길로 접어들어서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누상어린이집”을 지나 마을뒷산이 인왕산 자락길을 따라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좌측에 표지판이 있다. “윤동주하숙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길 57 이다. 광복70주년인 2015년12월30일이라고 작혀있다. 옆에 크게 한글로 윤동주하숙집이라고 써놓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이곳에 머물면서 종종 효자동길을 따라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다듬곤 했다.

윤동주하숙집을 만나다

윤동주문학관가는길

기자는 다시 발길을 돌려 “윤동주문학관”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두 개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최규식경무관과 정종수경사의 동상이다. 최규식경무관은 1968년1월21일 북한무장공비의 청와대기습시 검문을 하자 공비들이 쏜 기관단총을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순직하였다.정종수 경사도 공비와 교전중 순국하였다. 동상 바로 앞이 윤동주 문학관이다.

기자는 다시 발길을 돌려 윤동주문학관으로 향했다.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이다.

“윤동주문학관”은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다. 느린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가압장처럼, 우리 영혼에 아름다운 자극을 주는 시인의 작품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었단다. 윤동주 문학관은 우리 영혼의 가압장이다.

윤동주 문학관

제1전시실은 시인채이다.사진촬영이 금지되어있다.

우물이 있다. 시인의 순결한 시심을 상징하는 순백의 공간 인간 윤동주를 느끼는 공간으로 9개의 전시대는 시인의 인생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배열한 사진자료와 친필원고 영인본이 전시되어있다.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제2전시실은 열린우물이다. 윤동주의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용도폐기된 물탱크의 윗부분을 개방하여 중정을 만들어 열린우물이라 명명하였다. 지금도 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제3전시실은 닫힌우물이다. 또 다른 용도 폐기된 물탱크의 원형이다. 이곳은 시인의 영상물을 상영하는곳으로 이용된다.

밖으로 나오면 별뜨락이라는 휴식의 공간이다. 방문객들이 카페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서울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문학관 뒤로 오르면 시인의 언덕(산책로)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눈 아래 펼쳐지는 식민지 경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창의문 맞은편 길, 서울성곽 도성길 앞으로 이곳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임을 알리는 자그마한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는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고, 아래로는 옛날 시인이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서울의 풍경이 펼쳐진다.

윤동주문학관 홈페이지 https://www.jfac.or.kr/site/main/content/yoondj01

윤동주 일본에서 유학

그리고 후쿠오카 형무소

사진설명 <서시>를 새긴 윤동주 시비(詩碑) 사진. 일본 교토시 도시샤 대학 소재. (사진출처:독립기념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친구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사진출처:독립기념관)

사진설명 윤동주 판결문(1944.3.31,교토지방재판소) . 일본 교토지방재판소는 1944년 3월 31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윤동주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하였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윤동주 유고본 서시를 보관한 광양망덕포구

정병욱 생가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윤동주의 시집이 보관되었던 전남광양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이다.등록문화재 제341호이다.

정병욱은 징병을 가면서 어머니에게 귀중한 자료이니 잘 보관해 놓으라고 부탁을 한후 구사일생으로 돌아와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게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세상에 탄생하다

정병욱 그는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가 수필 [잊지못할 윤동주]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정병욱은 한국의 국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외에도 한국 고전 문학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주 전공인 고전 시가를 비롯해 고전소설등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판소리에 있어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부산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27년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윤동주와 정병욱의 인연은 이랗게 광양 망덕포구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통하여 이어져 오고 있다.

3.1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이다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자한다

미래의 100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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