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인규 1843 ~ 1899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공적개요 :
  • 1896년 관동창의군에 참여 활동
  • 1907~1909년 아들 권종해, 민긍호 의병부대,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활동
  • 1919년 아들 권종해, 손자 권기수, 3.1운동 중 만세시위운동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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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인규 강릉항일기념공원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율곡로 17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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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843년(헌종 9년) 강릉의 초당(草堂)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헌규(獻圭)이고 자는 경행(景行)이며, 호는 동빈(東濱), 소운(巢雲), 소은(巢隱)이라 한다. 본관은 안동으로 추밀공파에 해당한다. 생부는 사필(思珌)였으나 동생인 극(極)의 양자로 들어갔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동몽교관을 제수 받았으나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유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강원도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은 선생으로 하여금 의도하지 않은 투쟁의 노선에 나서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이 강릉의 선교장을 공격하여 점거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선생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물리치는 반(反)동학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강릉일대에서의 농민군은 1894년 8월중순경 봉기하여 9월 4일에 강릉으로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강릉부를 점령하였다. 다음날 농민군은 강릉부 관아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내걸고 삼정(三政)을 삭감하고 요호(饒戶)와 향리들을 체포하여 토지와 재산을 빼앗았으며, 9월 6일에는 강릉부 최대 지주였던 이회원(李會源) 집인 선교장(仙橋莊)을 공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회원은 농민군에게 백미 100말과 돈 300꾸러미를 보내 경계를 풀게 하고, 한편으로는 각지에 연락하여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민보군은 9월 7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한밤중에 농민군을 급습하였다. 경계를 풀고 잠자리에 들었던 농민군은 대패하였다. 농민군은 20여명의 시체를 남기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 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회원은 이어 영동 9군 대도호사 겸 관동 26읍 소모사가 되어 이진석을 도총에, 이영찬을 대장(隊長)에 임명하고 박동의를 종사로 삼아 봉평, 대화, 평창 등 강원도 일대에서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선생은 이회원의 통지를 받고 민보군에 참여하여 주로 문서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문집인 [소은창의록』에 보이는 [토동비서(討東匪序)]가 있는데, 여기에는 이회원의 활동상이 잘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실천적인 삶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직후 전개된 의병투쟁으로 이어진다. 일본에 의해 을미사변이 자행되고 단발령이 공포되는 사태를 보고 선생은 비록 나이 먹어 병들었으나 목숨 바쳐 도이(島夷 섬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맹서하였다. 선생의 거의 논리는 철저한 위정척사론에 기반하고 있다.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척사부정(斥邪扶正), 즉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붙잡는 행위로 보았다. 선생은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키는 행위는 의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민용호의병에 참여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발표하여 지원하기도 하였다. 여주 출신인 민용호는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여주를 떠나 1895년 12월 1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송형순, 이병채 등과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민용호는 평창의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12월 18일(양력 2월 1일) 강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사 이승학(李承學) 등 강릉의 토착세력에게 군무첩을 내려 이들을 의병에 편입시켰다. 


선생은 민용호의진에서 주로 격문 또는 포고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작성한 문서들이 [소은창의록]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활동내용과 창의 이념을 알 수 있다. [소은창의록]에 수록된 의병과 관련 있는 문서로는 [예안(禮安)창의소에 답한 통문], [창의 포고문], [창의 통문], [관동 창의소 포유문], [관동 창의사 효유문], [서고문]등과 서간문인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와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선생이 민용호를 만난 것은 그가 강릉에 들어 온 직후로 보인다. 선생은 민용호와 만난 후에 그에게 큰 기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의진에서 나온 선생은 12월 말에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작성하여 민용호의진인 관동 9군 도창의소가 설치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의병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아! 우리 5백년 대소 신민들아, 저 왜놈의 극악함은 어찌 차마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강산에는 아직도 2 능(陵)의 원수가 남아 있고, 천지에는 또 8월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설사 그놈들의 배를 쪼개고 그 놈들의 간을 씹지 못할망정 또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깎으며 그놈들의 호령을 따른 단 말이냐. 원통하고 원통하다. 


여기서 선생은 일본을 임진왜란의 원수이며, 국모를 시해한 섬오랑캐라면서 철저한 척왜론적 인식을 견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또 고개를 숙이고 단발령과 같은 그들의 정책을 따를 수 없음을 선생은 분명히 밝혔다. 선생의 포고문은 민용호를 만난 직후인 12월말에 발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직 타고난 양심은 일찍이 하루도 의(義)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요즘 창의통고문을 마련하여 네거리에 써 붙이고 대소 인민과 왕래하는 나그네들을 타일러서 의를 따르는 자의 마음을 고동시켜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였는데 과연 보셨습니까? 


라고 창의통고문을 사방에 써 붙였음을 밝히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선생은 1896년 설을 지내고 민용호부대에 다시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관서와 관북지역의 주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강릉지역에 의병도창의소가 창설되었음을 알리고, 관북은 이성계가 왕업의 기초를 닦은 곳이요, 관서는 기자의 첫 교화를 받은 곳이라면서 난세를 당하여 한번 죽어 대의를 이룰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선생은, 


슬프다. 사람이란 죽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큰 것이지만, 그러나 머리 깎고 살면 살아도 욕이요, 의(義)를 안고 죽으면 죽어도 역시 영광이다. 하물며 여러분께서는 모두 공자 맹자를 외우고 법 받는 처지이니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또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는 것이 바로 이때에 있으니 부디 힘쓰소서. 


라면서 살신성인(殺身成仁)과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또한 각 항구에서 일본에 붙어서 생활하는 자들에게 효유문을 발표하였다. 이 효유문에서 선생은 '우리 땅에 머물러 있는 왜놈은 종자도 없이 모조리 없애야 한다. 또는 소위 우리나라 대신으로 왜놈의 심복이 된 자와 수령들로 백성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처단해야 한다'라면서 일제와 부일개화파를 철저히 처단해야 할 것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선생은 의병이 거리에 넘치고 있으며, 의병이 가는 길에 일제와 붙어 협력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의병에 합세하여 일제를 격퇴하는데 합력할 것을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오늘의 의거는 충분히 격동되어 사생을 헤아리지 않고 왜적을 쳐 없애기로 다짐한 거의니 도(道)마다 의병이요, 읍마다 의병이라. 의병이 있는 곳에는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울 것이니 저 극악한 왜놈들은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포로써 왜놈을 끼고 작난하는 몸은 어찌 밝은 이 하늘아래 목숨을 보존할소냐. 너희들의 타고난 양심으로 돌아오고 우리 선왕의 끼친 은택을 생각하여 의병이 가거들랑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고 따라 붙어 함께 추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영원히 이 강산을 깨끗이 하자. 아! 5백년 역사를 가진 우리 선왕의 유민들이여. 


한편 선생은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방책을 제시하며, 의리에 기초한 의병정신에 입각하여 의병투쟁을 지도해 나갈 것을 권유하였다. 


1.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의리로 이루어 나갈 것.

2. 사람을 쓰는데 반드시 심지가 깨끗하고 충의가 돈독한 자를 택하여 소임을 맡길 것

3. 이욕(利慾)을 영위하는 협잡배는 일체 쓰지 말 것.

4. 재정을 마련하는데 공정한 마음으로 경중을 헤아리고 우열을 따지며 사의(私意)로써 후박(厚薄)을 두지 말 것. 


민용호의병은 원산의 선평장전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민용호부대가 원산을 공격한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3월 19일(음력 2월 6일) 선평장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을 기습하였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은 원산수비대와 군함에서 파견한 육전대(陸戰隊) 등 도합 150여 명 정도로 이들이 천여 명의 의병과 격전한 것이다. 이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악천후로 의병들은 화승총을 쏠 수 없는 상태였다. 일본군은 이를 이용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원산수비대장 중천(中川)소좌가 대본영의 소전(小田)대좌에게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의병은 30여명이 전사하고 5명이 포로가 되는 등 참패한 것으로 보인다. 1896년 2월(음) 선생이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바로 선평장전투 직후 보낸 것으로 보인다. 편지에서 선생은 북진의 첩보를 밤낮으로 바라고 바랐는데, 마침내 실패했다는 기별을 들으니 하늘이 의사를 돕지 아니하여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사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인가. 책상을 치며 크게 소리치자 피눈물이 쏟아집니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승패는 병사의 상사니 한 번의 실책으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분발하여 덕으로써 인심을 무마하고 의로써 사기를 고동시켜 뒷일을 튼튼히 하면 오늘의 한번 실패가 후일 백전백승의 복선(伏線)이 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승패는 병가의 상사이니 기운을 잃지 말 것과 인심을 회복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기대하였다. 선생의 의병활동은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선생의 아들인 권종해는 1907년 후기 의병시기에 강릉에서 거의한 후 이강년의병과 함께 의병투쟁을 벌였다. 또한 선생의 손자인 권기수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함으로써 3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가족은 일제로부터 가혹한 학살을 당하고 옥고를 겪는 등 피맺힌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아들과 손자들의 독립투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들인 권종해(1869~1922)는 호가 성파(惺坡), 자가 선명(宣明), 이명은 주성(周成)이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직후 원주에서 봉기한 민긍호부대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부터는 이강년의진과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그 해 3월에는 백담사전투에서 큰 공을 수립하였으며, 이후 인제의 운두령전투와 정선의 단림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강년을 체포한 직후인 6월 6일 권종해의 집을 습격하여 모친 경주김씨를 살해하고, 둘째 아들 증수(曾洙)의 복부를 총검으로 찌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권종해는 1909년 4월에 강원도 양양에서 활동하는 등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국망 후에는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하여 의군부에 가입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정만교와 함께 귀국하여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 충북 일대를 잠행하면서 무력 항쟁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증손 권영좌 증언).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권종해의 장자인 권기수(權基洙 1894-1922)는 호가 청계(靑溪), 자는 성후(聖厚)이다. 권기수 역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영월, 평창, 정선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경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1922년 순국하였다(권영좌 증언). 1991년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