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1890 ~ 1923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공적개요 :
  • 1913년 경북 풍기에서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
  • 1920년 암살단을 조직하고 일제 고관 처단 등을 추진
  •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 1923년 일경과의 전투 끝에 자결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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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지 김상옥열사 동상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8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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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에 참여하다 


김상옥(金相玉, 1890. 1. 5~1923. 1. 22) 선생은1890년 서울 동대문 효제동에서 아버지 김귀현과 부인 김씨 사이의 4남매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8세때 쳇불(체의 그물) 공장 직공과 14세에 말발굽 제조 직공 등으로 생계를 도와야 했던 빈한한 가정의 소년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궁핍한 생활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당시 식민지시대 한국인들의 일방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17세가 될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고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주경야독에 힘썼으며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자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등 배움에 대한 남다른 정열을 보였다. 23세가 되는 1912년에는 남한 각지를 전전, 약행상을 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어 영덕철물상점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고 1913년에는 경북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말총모자회사를 설립, 당시 대부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일화배척과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평화적 운동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무력투쟁으로 나서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은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체험하면서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지는 감동적인 독립만세의 함성은 남다른 의지를 가진 한 청년에게 민족에 대한 각성과 스스로의 삶을 던질 인생의 목표로서 독립운동을 설정하도록 하는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동년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여사의 집에서 박노영,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전우진 등 청년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4월 17일 각지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혁신공보] 1호의 발행을 시작으로 그 해 9월까지 매회 1천부씩의 지하신문을 비롯하여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와 항일전단을 제작,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웠다. 선생은 신문제작의 재정지원을 맡는 한편 배포책임자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일제의 인쇄시설 압수로 인해 9월에 접어들면서 신문발행은 중지되고 만다. 또한 자신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는데 이는 선생이 40여일에 걸친 갖은 악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부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후로 선생은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운동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쟁취의 방안을 구상하게 된다. 때마침 1920년 1월 초순 중국 만주 소재 독립군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을 만나 무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게 되자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갔다. 이윽고 동년 4월경 김동순, 윤익중, 서대순 등과 함께 무장 의열투쟁을 지향하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이미 철물상점의 경영 등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던 상태에서 선생이 격렬한 의열투쟁의 항일방략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대한광복회에서의 활동경험과 함께 선생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맨손으로 무장한 경관을 때려 눕히고 군도(軍刀)를 탈취했을 정도로 호협한 그였다. 선생은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별도의 의열투쟁을 계획, 권총 40정, 탈환 3천발을 휴대하고 입국한 광복단결사대의 한훈과 제휴하여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고관의 주살과 적기관 파괴 등을 실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거사 하루 전 피체,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 가입 


그러나 거사 하루 전인 8월 23일, 한훈과 김동순 등이 피체됨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선생은 일경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였다가 동지들의 자금지원에 힘입어 그 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을 길을 떠나게 된다. 상해에서 선생은 임시정부 선배지사들의 격려와 이들의 경륜을 접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혀갔고 종전 주살단에서의 활동과 그 성격이 유사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에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21년 7월에는 일시 귀국하여 충청과 전라도 등지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수합하였으며, 이후 동지 장규동과 함께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서울 돌아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성공 


상해에서의 생활은 의미 있는 것이었으나 뜨거운 가슴을 지닌 선생의 기질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칩거하며 한탄으로 때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때를 만들어갈 것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뜻을 동지들과 상의한 후 드디어 1922년 11월말 동지 안홍한과 함께 트렁크식 나무 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백발 그리고 항일문서 등을 숨긴 채 일생일대의 계획을 가슴에 품고 상해를 출발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의 귀국 목적은 암살단 이래의 숙원인 종로경찰서(당시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 압살하여 한국인들의 원한의 상징인 곳이었다) 폭파와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의 주살에 있었다. 동지들과 작별할 때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거사에 임하는 그의 비장하고 결연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옛 동지들인 전우진과 이혜수의 집에서 정설교, 윤익중 등과 회의를 거듭하며 거사준비를 갖추어 갔다. 우선 필요한 것은 활동자금이었다. 이들은 항일문건과 독립운동자금영수증, 인장 등을 제작하는 한편 거사용 폭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드디어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의사는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편 동일당이란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이 창문에 적중하여 터지는 굉음은 마치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는 우렁찬 함성과도 같았고 일제에게는 그들의 종말을 예고하는 철퇴처럼 강렬했다. 선생은 폭탄 투척 후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 소재 고봉근의 집에 몸을 감추었다. 고봉근이 그의 매부일 뿐 아니라 다음의 목표인 재등총독 주살을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삼판동이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이어 1월 17일 일본 제국의회에 참석차 동경으로 떠나는 재등총독을 서울역에서 저격, 사살하기 위해 서울역을 사전 답사하는 등 계획을 추진해갔다. 그러나 동대문서 한인순사 조용수의 밀고에 의해 은신처가 탐지되었고 1월 17일 새벽 종로경찰서의 무장한 순사 14명이 고봉근의 집을 포위하였다. 열에 아홉 발을 명중시킨다는 정확한 사격술을 갖춘 선생은 일경과의 격전 끝에 종로경찰서 유도사범 전촌장칠(田村長七)을 사살하고 금뢰와 매전에게 중상을 입힌 후 포위망을 탈출,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린 후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넘어 왕십리 근방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입고 변장하고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지들과 재등실 암살의 기회를 모색하던 중 마침내 은신처를 탐지한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명(천 여명이라고도 한다)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반경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곳이 마지막 격전장이 될 것을 예감한 듯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5채의 가옥을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다. 조국독립의 염원을 담은 그의 총구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일경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실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세로 대한남아의 기백을 떨친 것이다. 


일경 4백여명과 홀로 총격전 끝에 장렬한 자결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율전청조(栗田淸造)를 비롯한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다하였다. 이제는 항복하던가 자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생은 마치 상해를 떠나올 때 동지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듯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하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 34세였다. 오직 조국독립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또 한시도 그 목표를 잊어 본적이 없던 의사였다. 더욱이 남들이 꺼리는 의열투쟁의 선봉에서 서서 적지화된 서울 한복판 적의 심장부와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수백 명의 무장경찰을 우롱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치다 마침내 그 고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산화한 것이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열한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니 최후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시신은 1923년 1월 26일 가족들과 그의 뜻을 추모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찾아온 학생들의 호곡 속에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0여 일 동안 일경들을 전율케 했던 열혈의사의 장례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행렬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 항일행적과 민족정신은 당시 한국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줄기 빛과 같이 이어져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