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1902 ~ 1974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공적개요 :
  • 1919년 서울, 문경에서 3.1운동 참가
  • 1922년 흑도회, 흑우회 결성
  • 1923년 불령사를 조직하여 일왕 폭살 계획
  • 1945년 22년 2월간의 옥고 끝에 석방
관련장소 :
  • 박열의사 기념관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관련콘텐츠 :

파란만장했던 선생의 항일 투쟁 기록 


박열(朴烈, 1902. 2. 3~1974. 1. 17)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해방 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선생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말았다. 북한에서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하였다. 1974년 1월 17일 서거하여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하지만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에 끼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남북한 양쪽을 비롯해 고향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미소 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아나키즘 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지만, 밑바탕에는 일제의 '천왕 체제'는 물론 남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모두를 거부하고자 했던 그의 자유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며 학업 포기 


선생은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성면 오천리 일대는 일찍이 일제에 의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 조선총독부의 후원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던 만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일찍이 오천리에는 인근 산지의 삼림과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1919년 1월 권농조합으로 개칭되었다. 선생의 맏형 정식과 둘째 형은 이 조합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1~22년경 마을 구장을 맡아보는 등 마을일에 적극 앞장섰다. 선생의 집안은 누대로 전통적인 양반 가문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고 한다. 7세인 1908년부터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에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이 지방 최초로 설립된 4년제인 보통학교에 통학하면서, 선생은 민족의식 형성에 큰 계기를 갖게 된다. 즉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그 동안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며 조선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일본교사는 형사라는 선생님의 말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선생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하여 민족을 위한 큰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선생은 농사를 지으라는 맏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그는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이른바 대역사건(일본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음모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였던 선생은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부인 가네코 후미코와의 운명적인 만남 


고향 문경에 돌아온 이후에도 선생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919년 10월 경 그는 도쿄로 가는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도쿄에 도착한 선생은 여느 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의 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험난한 고학생활 속에서도 그는 틈틈이 단기어학 전문학원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토시히코, 이와사 사쿠타로 등 당시의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찾아가 직접 교류하면서 그들의 반제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사상에 공명하게 되었다. 선생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떠나라고 명령하고,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1922년 2월 경 선생은 그의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요코하마 태생의 그녀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오면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이었다. 약 7년 동안 조선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한 바 있는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은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선생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곧 만남을 통해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흑도회와 흑우회, 불령사 활동 


도쿄 고학생 동우회와 혈권단 등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선생은 김약수, 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였다. 저명한 일본 아나키스트인 이와사 사쿠타로의 후원아래 다양한 항일투사들이 결집된 흑도회의 회원들은 세계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일본 사상단체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나아가 그는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아 창간호와 2호를 발간하여 항일세력의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하였다. 흑도회는 1922년 8월 니카다현 나가스가와(中津川)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착취와 학대로 다수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선생과 김약수를 조사단으로 파견하였다. 이어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9월 7일 도쿄 ymca에서 보고하기에 이르렀는데,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롯해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는 등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선생은 이 사건과 같은 반인도적 행위가 민족차별과 식민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의 근본적인 파괴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니카타현 조선 노동자학살사건의 조사를 계기로 흑도회에는 식민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투쟁을 강조하는 선생과 대중적 전위정당을 추구하는 김약수와의 균열이 발생하였다. 실제로 선생은 국내에 사건보고를 위해 들어왔다가 김한 등 의열단 간부들을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하였다. 김약수 역시 조선인노동조사회와 노동자동맹을 결성함에 따라 흑도회의 해체를 불러왔다. 선생은 1922년 12월경 김약수 등과 결별한 후 직접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하였다. 결성 당시 회원은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포함해 신영우, 홍진유, 서상일, 박흥곤, 장상중 등이었다. 흑우회 멤버들은 곧 사무실 내에 민중운동사를 세우고 1923년 5월경 기관지 [민중운동]을 발간하였다. 순수 조선문으로 발간된 이 월간 사상잡지의 발행을 위해, 선생은 흑우회 사무소에서 편집 및 통신을 비롯한 기타 일체의 사무를 보았다고 밝혔다. 흑우회는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전개하였다. 흑우회원들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現社會)]라는 기관지를 통해 과격사회운동 취체법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대규모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또 일본 노동단체 주최로 열린 세계노동절 행사에 참가해 8시간 노동제 실시와 조선의 해방을 외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 등 흑우회 멤버들도 대회에 참가하다가 경찰의 검속에 걸려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이 밖에도 흑우회원들은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서울과 도쿄의 노동단체들과 연락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대외 연대활동을 펼쳤다. 


일왕폭살계획과 옥중투쟁 


선생은 1923년 4월 중순경 흑우회와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으로 조직된 불령사에서 선생은 정기모임을 통해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직접활동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그는 보다 적극적이며 파괴적인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하려 하는 한편, 의열단의 중요간부인 김한을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다. 세 번째에 걸친 폭탄 반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23년 가을의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에게 폭탄구입 여부를 타진하였으나, 구입비용 때문에 잠시 보류하였다. 이때까지 선생은 폭탄을 구입해 이를 언제, 어디에 투척할 것인지 분명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해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이런 와중에 일본내각과 군부는 1918년 쌀폭동 당시의 민란움직임을 사전에 막기 위해 도쿄시내와 인근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완전 무장한 상태의 군대와 경찰은 이 기회를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하였다. 정부의 고의적인 유언비어 살포로 인해 자경단과 민중들조차 이 광란의 대학살에 참여한 나머지,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과 약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하였고, 6천여 명이 검속되기에 이르렀다.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 회원들 역시 9월 3일경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검속되었다. 일본경찰은 이어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를 명분으로 한 달간의 구류에 처하더니, 곧 불령사를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혐의로 들어 구속 기소시켜 버렸다. 이러한 조치는 선생과 불령사를 오랫동안 감시해온 경찰의 사전계획에 의해 취해진 것이다. 경찰의 취조 도중 선생의 폭탄구입계획 사실이 알려졌다. 이때부터 일본정부와 검찰은 불령사를 폭동과 일왕 암살을 꾀한 조직사건, 즉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했다. 검찰은 이듬해 1월 27일 선생 부부의 폭발물 유입계획과 불령사 조직을 연결시켜 이 사건을 대진재(大震災)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으로 보도하였다.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각계여론과 조선인들의 들끓는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정부의 계략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검찰이 선생과 가네코 후미고, 김중한 세 사람 이외의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함으로써 스스로 실패하였음을 인정하였다. 


선생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그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일본사법부가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그는 조선 전통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인 것이다. 나아가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 등의 글을 읽으며 일왕의 죄를 폭로하였다. 일본정부는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만에 특별 감형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스스로 조작사건의 실체를 드러내 준 꼴이 아닐 수 없다. 사형판결 후에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 하였고, 부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면장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저항의지에 대해 일본 재판장까지도 감동하여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 당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불행한 세기의 연인은 각각 치바(千葉)형무소와 도치키(?木)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눈물의 이별을 해야 했다. 가네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가혹한 삶과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아 출간하였다. 


일제는 두 사람의 항일의지를 꺾기 위해 사상전향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편지왕래나 독서내용을 제한한 것은 물론, 글 쓰는 것도 방해하거나 전향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급작스럽게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가매장되었다.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인해 비밀리에 선생의 친형에게 전해졌고, 무사히 경북 문경 팔령산에 옮겨 묻힐 수 있었다.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의 기구한 삶과 사랑은 두 사람의 다정한 포즈가 담긴 사진이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또 다시 일본정계를 뒤흔들었다. 즉 두 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검사와 예심판사가 두 사람을 동석시켜 사진을 함께 찍었고, 이 사진을 빌미로 야당에 의해 대역죄인 우대라는 정치공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내각의 총사퇴와 사법관 파면 등 세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는 선생에게도 꾸준히 전향공작을 펼쳤다. 일본 사법당국은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전향선언을 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전향서라고 밝힌 글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천황의 적자를 자처하거나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등 일관성이 없으며, 이전의 문투와 달리 일본식 표현을 쓰는 등 조작의 흔적을 짙게 남기고 있다. 더욱이 일제는 그에게 어떠한 감형이나 출옥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1945년 10월까지도 정치범이 아니라 대역사범(大逆事犯)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 했다.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선생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해방 후 재일본거류민단 단장 활동과 납북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선생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다. 실로 22년 2개월이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의 수감기록이 아닐 수 없다. 23년만의 생환 못지않게 해방 후 선생의 삶 역시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도쿄에서 열린 석방환영 대회에서 그를 옥중에서 감시했던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藤下伊三郞)가 수천의 조선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이날 그는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아들을 선생의 양자로 바치고,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선생이 도쿄에 돌아오자, 당시 재일조선인연맹 등 조선인단체들이 앞다투어 그를 지도자로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강훈, 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민주주의적 건국의식 사해동포적 세계협동 근로대중의 동지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동맹의 강령에서는 아나키즘의 자유사상과 개방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등 중도우파의 색채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선생은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즉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쓸쓸히 버려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국으로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어 그는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선생은 초대단장으로 추대되었고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이 맡았다. 초기민단은 일제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 반공산주의적 재일동포단체로 자리잡아갔다. 당시 이승만도 일본에서의 입지를 고려해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선생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다. 이 회담 이후 선생은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굳히고 말았다. 이후 1947년경 이승만 정부는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선생의 이승만 정부지지 방침은 오랜 수감생활로 인한 정세판단의 미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를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 초빙하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독재정권의 부패와 권력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민단 내부의 분열만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선생은 1948년 2월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뀌기 전, 민단의 재정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세력 등의 내부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 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해 돌아와 서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사흘 뒤 인민군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북으로 건너간 이후 선생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다른 납북인사들의 소식과 함께 일부 전해질 뿐이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일은 그가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한 사실이다. 이 협의회는 당시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 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강령을 살펴보면, 외국군대의 즉각적 철수와 군대 축소,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제적 중립화의 선언 등 민족공동의 이해와 민중 생존권에 입각한 자주, 평화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남북한 자유왕래와 교류, 총선거 실시와 통일헌법 제정 등 5단계에 걸친 통일방안을 제시하였으나, 북한정권의 불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생을 비롯한 조헌영 등은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위원장과 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고, 그 해 2월 남한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