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1910 ~ 1944 195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공적개요 :
  •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 1930년 중국 망명, 의열단 가입
  • 1936년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관련장소 :
  • 박차정의사 상부산광역시 금정구 체육공원로29번길
  • 박차정의사 생가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98번길 129-10 (칠산동 박차정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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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다 


박차정(朴次貞)선생은 1910년 5월 7일 경남 부산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의 3남2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일찍부터 신(新)문물에 눈을 떠 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탁지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였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어머니 김맹련은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삯바느질을 하는 등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동래군 기장면 출신으로 일찍이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선생과 의형제를 맺었던 약수(若水) 김두전(金枓全)과는 육촌 사이었고 김두봉(金枓奉)과는 사촌의 사이었다. 이 같은 집안의 가계로 보더라도 어머니 역시 강한 사상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 역시 이러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동래일신여학교에서 항일의식을 심화하다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선생의 항일의식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일신여학교는 선교계 학교이면서도 민족정신의 함양을 중요시 하여 조선어, 역사, 지리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많은 민족운동가를 배출해냈고 1919년 3.1운동 시에는 부산지역 만세운동 전개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니 가정에서 키워온 선생의 항일의식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을 말하면서, 이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고 애국지사들이 벌이고 있는 독립운동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일신여학교의 동맹휴학은 항상 선생이 주모자가 되었다. 당시 선생의 항일의식은 동래일신여학교의 교지였던 [일신(日新)] 2집에 실은 [철야(徹夜)]라는 글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자전적 성격을 지녔던 글로써, 일제하에 옥사를 한 어떤 독립투사의 아들과 딸이 고아가 되어서 추운 겨울 밤 사회의 냉대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밤을 밝히는 내용이다. 일제하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상징화한 것으로, 어려운 가운데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이겨나가겠다는 민족 해방에 대한 강한 염원을 담고 있는 글이라고 하겠다. 선생은 당시 문재가 뛰어나 이 외에도 시 [개구리], 수필 [흐르는 세월] 등의 글을 교지에 실었다. 


근우회 여성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선생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의 주도층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근우회 활동에서부터였다. 1924년경부터 민족해방운동 일각에서 논의되던 협동전선론은 1926년 초부터 구체적인 움직임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여 11월 정우회선언 이후에는 온 운동계를 휩쓸게 되었다. 여성운동계에서도 협동전선론이 논의되어 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기관의 결성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1927년 5월에 근우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근우회는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계열의 여성단체와 사회주의계열의 여성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통일기관으로 출발하였다. 신간회와 같이 반제, 반봉건운동을 내걸고 그 강령을 첫째, 조선여자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키 위하여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하며, 둘째, 조선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전적 이익의 옹호를 기한다고 하였다. 행동강령으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농민부인의 경제적 옹호,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임금 지불 등을 주창하였다. 선생이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중앙회에서 본격 활동을 한 것은 1929년 7월부터였다. 이 때 선생은 경남의 전형위원, 33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33인 중에서 선정된 14인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담당했던 업무는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이었다. 선생이 주도하고 있었던 동래지회는 1928년 5월 10일에 사회주의계열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조직으로 1929년 전국대회에서 동일노동에 대한 임금차별 철폐건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근우회 사건으로 검거, 구속되다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출판과 선전일을 맡았던 선생은 명실상부하게 근우회의 핵심간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 때 근우회는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근우회 사건으로 선생과 근우회의 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이 근우회사건은 1월 15일 오전 9시 30분 일제히 시위를 하였는데, 참가학교는 이화, 숙명, 배화, 동덕여고와 근화, 실천, 정신, 태화여학교, 그리고 여자미술, 경성여자상업, 경성보육학교 등 11개 학교였다. 선생은 시위조직의 배후세력으로 주목되어 근우회의 허정숙과 함께 구속되었다. 선생은 처음에는 서대문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일시 석방되었지만 1930년 2월 고향인 동래에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유치되었다. 이후 세 차례의 심문 후 2월 15일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 되었고, 2월 20일에는 서대문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기소가 성립된다는 의견서가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2월 28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로 처리되었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결혼하고 의열단 요원이 되다 


1930년, 선생은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북경에서 선생은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던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 3월 김원봉 선생과 결혼한 후에는 남편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활약하게 된다. 1932년 북경에서 남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김원봉 선생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설을 준비하였다. 김원봉 선생은 국민당정부와 제휴하여 혁명간부학교를 개설키로 하여 본격적으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에 앞장섰던 선생은 학교 개교 후 여자부의 교관으로 여자부의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임철애(林哲愛)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일본측의 자료에도 이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혁명간부학교의 교관들은 대개 의열단 단원으로 오랜 경험을 쌓아온 인물들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각종 비밀공작법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의 혁명의식을 강화하고 실천운동에서 필요한 변론을 훈련시키기 위해 1주일에 한번씩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1933년 4월에 1기 졸업생을 내고 1936년 10월까지 3기의 졸업생을 냈다. 졸업생들은 공작임무를 부여 받고 2, 3명이 한 조가 되어 공작지로 떠났는데 제1기생에게는 조선과 만주에 의열단 지부를 만들도록 하였고, 제2기생에게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기본군중에 기초하여 유격대를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과하였다. 


민족혁명당의 남경부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선생은 핵심멤버로 활동하였다.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은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과 함께 유일당 결성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선생은 1936년 7월 16일에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전체 민족해방운동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해외 조선부녀의 총단결로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편성하기 위해 결성된 부녀회의 기본인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의 여성은 오랫동안 전통적 속박으로 인권이 유린되어 왔고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전통적 속박에 의한 가정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약탈시장의 상품으로 임금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 아래 선각적 여성들에 의한 활동이 있었지만 일본경찰의 탄압과 지도부의 불통일에 의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또한 부녀 대중과 유리된 몇몇 간부들의 운동이어서 전 민족 혁명운동과 연결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운동이 대단한 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 우리 조선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중- 


이처럼 민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동시에 이루어낼 것을 강조한 부녀회의 기본인식과 구호는 과거부터 오랫동안 민족문제와 여성문제를 고민하고 실천해 온 선생의 생각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라디오 방송과 기고 활동을 통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규탄 


민족혁명당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1937년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창립을 선언하였다. 민족전선연맹의 목적은 국외 및 국내의 민족 혁명가를 총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중국의 항일전선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당시 선생은 한구에 머무르면서 여기에서 개최된 만국부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장사에 있었던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였다. 선생은 임철애(林哲愛)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 경고일본적혁명대중(敬告日本的革命大衆)이라는 글도 실었는데, 이는 앞서의 방송 원고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었다. 이 글에서 선생은 일본제국주의는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 민중의 적이므로 우리들은 반드시 긴밀하게 연합하여 공동의 적을 타도하고 진정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나아가 이번 중일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고 아울러 동방의 피압박대중들은 해방될 것이니, 일본 혁명대중들이 국내의 혁명전쟁을 일으켜 파쇼 군벌을 제거하는 것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조선민족전선] 제3호(1938. 5. 10)와 제5, 6호(1938. 6. 25)에서는 조선부녀여부인운동(朝鮮婦女與婦女運動)이라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선생은 여성운동을 3.1운동 이전과 이후, 1927년 이후와 광주항일학생운동 이후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 중국의 전면 항일전쟁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우리 부녀자들도 일치단결하여 일어나 신성하고 위대한 민족해방전쟁에 참여하여서 조국의 자유 회복, 동아시아의 화평, 인류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 


조선의용대의 복무단장으로 맹활약하다 


한편 1938년 10월 10일 조선민족전선연맹은 한중연합전선의 형식을 빌려 항일무력으로써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 김원봉 선생 등에 의해 지도되었던 초기 의용대는 조선민족입장에서의 중국항전참가, 일제타도, 조국해방의 임무를 자임하고 창설되었고 그를 수행하기 위한 공작으로 전선공작, 적후공작, 동북진출 세 가지를 설정하였다. 선생은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의용대 본부에는 최동선을 단장으로 하는 3.1소년단이 있었고, 여자포로들도 훈련소에서 1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 퇴소함과 동시에 의용대 대원으로 전입되어 의용대 내에 여자대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선생은 이러한 여성대원들의 선봉에서 싸웠다. 1939년 2월 선생은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는 선생이 의용대의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음을 말해준다. 중경으로 옮겨온 이래 선생과 김원봉 선생은 남안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였다. 하지만 김원봉 선생이 임정의 군무부장에 취임했던 즈음인 44년 5월 27일에 선생은 곤륜산 전투에서의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였다. 선생은 병상에 있으면서도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완수하는데 참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글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35세의 나이로 어려서부터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 항일투쟁에 혼신을 다했던 선생은 해방을 1년 앞두고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 선생은 박차정의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 감전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