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 1872 ~ 1909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공적개요 :
  • 1904년 데일리메일daily mail 특파원으로 내한
  • 1904년 양기탁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 을사조약 무효 주장, 침략행위 폭로 항일언론 활동 전개
  • 1908년 대한매일신보 논설로 상해에서 3주간 금고
  • 1909년 항일언론 활동을 계속하다 심장병으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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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통한 항일 


한말 최대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영국인 베델(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은 한영수호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후 오늘날까지 130여 년 간 한국인들에게 가장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은 영국인이다. 베델은 런던에서 발행되던 신문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국운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진 약소국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의혈 청년이었다. 37살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은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였다. 베델은 영국, 한국, 일본 세 나라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베델은 17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15년 동안 고베(神戶)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지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곧 서울에서 신문을 창간하여 강력한 항일논조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베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신문사에 답지했다. 해외에서도 애도의 마음을 표하는 글들이 신문사로 날아왔다. 베델은 그가 사랑하던 나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잠들어 있다. 베델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위급한 시기에 신문을 발행하였다. 1904년의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은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거물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국의 내정에 직접 간여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실상은 일본의 통치를 받는 처지였다. 주한 일본 헌병대는 모든 신문을 발행 이전에 검열하여 반일 언론을 억압하였다. 베델은 이 같은 상황에서 3개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①국한문 대한매일신보, ②순 한글 대한매일신보, ③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그것이다. 하나의 신문사에서 3개의 신문을 동시에 발행한 사람은 베델이 처음이었다. 그의 신문은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침략을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일본군은 한국 언론을 철저히 탄압하였지만 베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해서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의 신문은 통감부가 자행하는 검열과 압수를 피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하고 고무 격려하였다. 한국인들은 베델의 신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다. 고종도 베델을 지원하고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본부이자,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거두는 총합소가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에 베델은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하거나 베델이 발행하는 신문을 폐간시켜야 한다고 영국에 강력하고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베델의 처리를 둘러싼 영일 간의 외교교섭은 1904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은 후인 1910년에야 마무리되었다. 그 중간에 영국은 일본의 요구와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베델을 두 번이나 재판에 회부하였다. 


베델은 어떤 인물인가 


1) 항구도시 브리스톨 출생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발행한 베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떤 계기로 자신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약소국이자 망할 운명에 처한 한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웠던가. 베델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베델의 할아버지 토마스 베델은 브리스톨 근처 클리브던에서 바지선을 운행하던 사람이었다. 바지선을 소유할 정도라면 중류 정도의 생활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베델의 아버지 토마스 핸콕(Thomas Hancock Bethell)은 20살이었던 1870년 마서 제인 홀름(Martha Jane Hollom)과 결혼하였다. 제인 홀름의 아버지, 곧 베델의 외할아버지인 존 홀름(John Hollom)은 영국 성공회의 전도사였다. 토마스 핸콕 부부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베델은 토마스 핸콕의 장남이었다. 


2) 고베에서 무역업 종사 베델의 아버지 토마스 핸콕은 188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콜(Nicolle)이라는 사람과 함께 고베시 42번지에 니콜 엔드 컴퍼니(Nicolle & Co.) 라는 소규모 무역상을 차렸다. 베델은 브리스톨의 명문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에서 공부하였다. 베델은 이 학교를 졸업한 뒤 18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이는 17살이었다. 베델 형제 세 명은 새로운 무역상을 설립해서 아버지 토마스 핸콕의 영업을 이어받았다. 베델의 무역상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영국 물품을 일본으로 들여오고 일본의 골동품 등을 영국에 수출하는 업종이었다. 베델은 이 무역상 설립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던지 이 해 영국에 한 번 다녀왔는데, 그때 26살이던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 1873. 11. 8. ~ 1965. 7. 2.)을 만나 이듬해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베델은 1888년부터 1904년 2월까지, 15년간 고베에서 살았다. 당시 고베는 서양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던 활기찬 국제도시였다. 


3) 활발용장 다재다능한 성격 베델은 천성이 외향적이고 활발하였다. 운동을 좋아했고, 체스도 잘 두었다. 술과 담배를 즐겼다. 음악에도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베델은 일본에서 한때 돈을 벌었지만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베델이 한국에 오던 때의 나이는 32살로 치밀하고 냉정하며 타산적이라야 하는 무역업보다는 타고난 성격으로 보아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천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베델은 AP통신과 관련을 맺은 적이 있으며, 1908년 제2차 재판 무렵에는 󰡔데일리 크로니클󰡕의 편집인 도널드가 특파원 자리를 주겠다고 제의한 적도 있었다. 언론인 베델의 능력은 영국과 미국의 일류 신문과 통신사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러일전쟁 취재 위해 한국에 오다 베델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날은 1904년 3월 10일이었다. 러일전쟁이 터진지 한 달 뒤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 나라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전황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에 몰려 왔다. 러일전쟁은 미국 언론의 역사에서는 이른바 옐로 저널리즘의 마지막 단계가 되는 때에 일어났다. 베델은 서방 여러 신문의 본사에서 파견된 쟁쟁한 특파원들과 함께 취재경쟁을 벌였다. 그는 짧은 기간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특종 한 건을 터트렸다. 4월 16일자 제5면 톱기사로 실린 「한국 황궁의 화재(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라는 기사다. 4월 14일 저녁 경운궁(慶運宮)의 화재 사건을 다룬 이 기사는 머리에 ‘from our special correspondent’라고 쓰고, 끝에다 ‘ERNEST BETHELL’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베델이 신문기자로는 첫 특종기사를 보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베델은 곧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신문을 발행하였다. 창간에 앞서 1904년 6월 29일에는 견본판[樣子新聞] 신문을 먼저 만들었고, 정식 창간한 날은 20일 뒤인 7월 18일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하루에 6면 발행으로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4페이지와 한글판 대한매일신보 2페이지로 영문판 위주의 2개 국어 신문이었다. 그러나 이듬 해 8월에는 두 언어 신문을 분리하여 국한문판 신문과 영문판 두 개의 신문을 발행하였고, 1907년 5월에는 한글 전용 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3개의 신문으로 확대되면서 장차 한ㆍ영ㆍ일 세 나라의 외교관계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 신문이 한일 양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에 큰 장애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보의 영향력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과 이에 맞선 한국민의 저항을 알림으로써 국제여론이 일본에 불리하도록 유도했다. 국내 정치상황에서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신문의 항일논조로 한국 내에서 항일 민족운동을 크게 고취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폭로 비판 


1) 황무지 개간권 반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창간되었을 때에 일본은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여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반일 민족운동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부터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어내어 이를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에 착수하였다. 일본은 처음에는 태국(Siam)의 땅을 얻어내려 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황무지 개간권은 이용·경작하지 않는 토지(황무지)를 일본이 개간하고 이용할 권리를 우선 50년 동안 갖도록 해 달라는 요지였다. 50년이 지난 뒤에는 사용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계약이 체결될 경우에 일본이 차지할 수 있는 ‘황무지’는 전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광대했다. 이 계약이 체결되고 시행된다면 한국의 광대한 토지는 영구히 일본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고, 일본인들은 대량으로 한국에 이주하여 한국 땅은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지가 될 처지였다. 일본은 과잉 인구를 한국으로 이민시켜서 인구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그들의 부족한 식량공급에 기여토록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다는 소문은 6월부터 일반 국민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양대 일간지 황성신문과 뎨국신문 등이 일본의 요구를 국민들에 알리면서 반대운동은 더욱 확산되고 있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은 주로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된 이 반대운동을 처벌하라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비밀리에 추진되는 외교교섭이 신문에 게재되는 데 대해서도 항의하고 관련자를 문책하라고 강요하였다. 일본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올수록 한국 정부의 상하 관리들과 전국의 유생들이 벌이던 반대운동도 더욱 치열해지면서 조직적인 민중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면서 한국과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내세워 강압적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따내려 했으나, 한국민들의 반대가 워낙 거세지자 이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 배일감정이 팽배하고 반일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이 문제를 유보해 두는 대신에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이른바 ‘제1차 한일협약’)을 조인하여 한국의 외교와 재정권을 틀어쥐게 되었다.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반일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던 무렵인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되었다. 창간 4일 만인 7월 22일자에는 외부협판 윤치호가 쓴 「황무지 개간 계획」이라는 글을 독자투고란에 게재하여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하였다. 영국은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주한 영국공사 조단은 일본공사 하야시와는 개인적으로도 극히 친밀한 관계였고, 한국에 관한 정보를 대부분 일본 측으로부터 입수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은 외교면에서 언제나 소외되는 처지였다. 주한 영국공사 조단은 베델의 반일신문이 영․일 우호관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된다는 보고서를 영국 외무성에 보냈다. 


2) ‘시일야방성대곡’ 영어 호외 발행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장지연은 20일자 황성신문에 우리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논설로 손꼽히는 「이 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를 실어서 그 통분함을 천하에 토로하였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동양 3국의 평화가 깨어지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하였다. 이 날짜 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폭로한 기사 「오건조약 청체전말」은 도저히 검열을 통과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장지연은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아침 일찍 신문을 배포한 다음에 일본 순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5시가 되자 일본 순사가 신문사로 와서 장지연을 체포하고 신문은 정간시켰다. 따라서 이제 그에 대한 후속기사는 대한매일신보가 알리게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1일자 1면 머리에 「황성의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였다. “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 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하리로다. 오호라 황성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고 찬양하였다. 같은 날짜에 「사장피착(社長被捉)」이라는 기사에서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하였다. 22일자 논설 「위재한일관계(危哉韓日關係)」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고 가옥과 토지를 강탈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명을 참살하고 재정을 고갈케 하며 학무를 감축하여 교육이 날로 쇠퇴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을사늑약의 체결도 황제를 비롯하여 정부 관리들과 국민이 모두 반대하자 일본은 군대를 궁궐에 끌고 들어와서 체결을 강요하였다고 논평하였다. 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인구 2천만이 모두 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를 가지고 국민을 모두 도륙할 것인가라는 내용이었다. 이날부터 대한매일신보는 정간 당한 황성신문의 「오건조약 청체전말」을 3회에 걸쳐 전문을 게재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25일자 논설 「황성긍린(皇城矜隣)」에서도 황성신문의 속간을 촉구했고, 26일자에는 장지연은 무죄인데도 법률을 어겨가며 구류 중이라고 경무청을 비난하였다. 법률에 따르면 24시간 이내에 장지연을 평리원이나 한성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되어있는 데도 이와 같이 여러 날 동안 가두어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황성신문의 복간을 촉구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 11월 27일에는 순한문과 영문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 호외는 한쪽 면에 「한일신조약 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전말을 실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영어 신문 재팬 크로니클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영문으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하여 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 사람들과 서방 여러 나라에 알렸다. 또한, 맥켄지는 한국의 비극이라는 저서에도 이를 전재함으로써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영문으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은 세계의 여론에 널리 호소하는 글이 되었다. 


3) 영국 트리뷴 신문 기자의 고종 밀서 

고종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막기 위해 열강의 개입을 요청하는 밀서를 여러 나라에 보냈는데, 그 가운데 영국 󰡔트리뷴󰡕 신문 기자 스토리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1년에 걸쳐 한ㆍ영ㆍ일 그리고 중국 등지에서 발행되는 신문에까지 보도되었을 정도로 긴 기간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여섯 항목으로 된 밀서는 고종이 을사늑약에 조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으며, 일본이 한국의 내정을 통제하는 일도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끝으로 한국 황제는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 통치[신탁 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는 요지였다. 일본의 독점적인 한반도 침략을 반대하고, 한국의 중립화를 열강이 공동으로 보장해 달라는 외교방침을 밝힌 내용이었다. 밀서가 작성된 날자는 1906년 1월 29일이었다. 밀서는 먼저 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린 다음에 로이터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한국, 일본, 중국의 신문들이 인용하고 전재하였다.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1907년 2월 28일자 논설란에 트리뷴의 기사를 보도했고, 헐버트가 발행하는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도 일본 신문을 인용하여 한국 황제가 을사늑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한 장본인이자 통감으로 부임해 있던 이토 히로부미도 팔짱을 끼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고종의 밀서가 가짜라고 단언하였다. 밀서에 관해서 자신이 고종에게 직접 물어보았는데, 황제는 즉석에서 부인하더라고 말하면서, 이 문서가 아마 궁중 근처에서 나오기는 했겠지만 고종이 수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자신이 이러한 변명을 해야 하는 사실 자체가 몹시 곤혹스러웠다. 을사늑약은 결코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체결된 것이 아니고,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근거가 흔들렸던 것이다. 고종 밀서의 진위여부에 관한 논란이 1년 가까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매일신보는 트리뷴에 실린 밀서 사진을 한 페이지의 좌우를 가로지르는 큰 사진판으로 실었다. 당시 신문은 사진을 거의 싣지 않을 때였다. 1907년 1월 16일자에 실린 이 밀서의 사진판이 국민들에게 미친 충격은 컸다. 반면에 밀서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 당국과 이토 히로부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은 고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한국민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고종의 밀서 사건은 이와 같이 1년에 걸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영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신문과 통신에 실리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베델과 그의 신문을 근본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에 더욱 강력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으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를 무력화하고 마침내는 폐간시키려는 작전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4) 의병 투쟁의 격문 같은 논조

일본이 베델의 추방을 영국에 요구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1907년 초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사세는 이 무렵에 급격히 신장되었다. 발행부수도 늘어나서 1907년 9월 무렵에는 국한문, 한글, 영문 세 가지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치면 1만 부가 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한국에서 발행되는 여타 신문 전체 부수를 합친 것보다 배가 넘을 정도로 압도적인 부수였다. 한국에서는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무척 높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대한매일신보는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통감부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양위했을 때에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한국인들과 일본 경찰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주장하고 베델의 추방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였다. 통감부는 영국 측에 여러 차례 끈질기고 강력한 태도로 베델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베델과 그의 신문은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베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의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될 것이었다. 의병들의 무장투쟁도 이 신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영국은 일본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지 한동안 망설이면서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베델은 두 차례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열렸다. 주한 영국 공사가 재판을 담당한 영사재판이었다. 일종의 약식재판이었다. 두 번째는 상하이주재 영국 검사와 판사가 서울에 와서 1908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4일 동안 서울 덕수궁 옆 현재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던 영국 총영사관에서 벌인 정식 재판이었다. 재판이 열리던 때는 전국에서 의병들이 무력으로 항일 저항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일본군 2만여 명이 의병 진압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책임을 물어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직후에 군대를 해산하자,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전개되던 위급한 상황이었다. 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는 베델의 2차 재판 후인 1908년 말까지 적어도 1만 4,000명의 한국인과 4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죽었는데, 이 가운데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섞여 있었다고 본국에 보낸 1908년 연례 보고서에서 지적하였다. 통감부는 이 같은 의병들의 소요가 베델의 대한매일신보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에서 발행되던 친일 영어신문 재팬 메일도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은 바로 의병대의 창의문(倡義文)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대한매일신보가 의병봉기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비난하였다. 통감부가 베델을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영국 측에 요구하자 주한 영국총영사 코번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총영사는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치안상태가 불안정한 가운데 일본을 향한 대한매일신보의 공격은 수그러지지 않을 뿐 아니라 수위가 점차로 높아지고 있다는 여러 사정을 고려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베델과 양기탁의 재판 


1) 영사재판, 6개월 근신

베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 오전 11시에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렸다. 총영사 코번이 베델에게 전달한 소환장에는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홈스(Holmes)가 번역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기사가 요약되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보도한 10건의 기사는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친 것’이라고 적시되어 있었다. 이튿날인 10월 15일, 코번은 베델에게 6개월의 근신을 명하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베델은 이러한 판결에 불복항소를 제기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코번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만일 베델이 재판에 불복하여 서약을 거부할 경우, 베델은 일단 한국에서의 추방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상하이 고등법원이 코번의 판결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고 번복해 주어야 하는데, 베델로서는 그런 판결이 나올 것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베델은 판결에 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델은 영사재판에서 근신형이 언도된 후 6개월 동안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를 다소 신중하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추방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신기간이 만료되자마자 일본을 공격하면서 통감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대한제국의 내각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일본은 특히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 저격 사건에 대한 보도를 계기로 베델 추방공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교섭을 통해서 베델의 추방을 요구하는 한편, 「신문지법」의 일부를 개정하여󰡐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와 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하였다. 신문지법은 일반적으로 ‘광무 신문지법’(1907년 7월 24일 공포)으로 불리는데 1908년 4월 29일자로 개정하여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도 판매와 배포를 금지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통감부는 이 법률을 내세워 대한매일신보사에 들어가 신문을 압수하거나 구독을 방해하는 등의 행정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통감부 기관지 서울 프레스를 동원하여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을 비난하는 등 다각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일본이 베델 추방 공작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대한매일신보의 탄압을 강화하자, 영국도 마침내 ‘베델로 인해 야기된 어려운 문제들을 즉각적이고 항구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베델의 제2차 재판은 1908년 6월 15일부터 3일 동안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렸다. 재판 진행을 위해 상하이 고등법원의 판사와 검사가 서울까지 왔으며, 이는 한ㆍ영ㆍ일 세 나라가 관련된 동양 역사상 처음 보는 특이한 재판이었다. 일본은 베델 문제를 정치적인 차원에서 처리해 줄 것을 영국 측에 오랫동안 강력히 요구했지만 영국은 끝까지 사법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2) 동양 역사상 최초의 법정 풍경

1908년 6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정동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베델에 대한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재판이 열린 영국 총영사관은 오늘의 프레스센터 빌딩의 맞은편 덕수궁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영국 대사관 건물이다. 재판은 한·영·일 세 나라가 관련된 특이한 국제재판이었다. 한국인의 이목이 집중된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영국과 일본 두 나라 외무성과 언론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었다. 재판 진행과정은 역사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고도 흥미로웠다. 등장인물만 보더라도 당시 한국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피고 베델을 비롯하여 상하이에서 이 재판을 위해 한국에 왔던 판사 보온(F. S. A. Bourne)과 검사 윌킨슨, 일본 고베에서 온 변호사 크로스(C. N. Crosse)는 영국인들이었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대리하여 고소인의 자격으로 참석한 사람은 통감부의 제2인자 서기관 미우라(三浦彌五郞)였으며, 증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의 실질적인 제작책임자인 총무 양기탁, 의병장이었던 민종식(閔宗植)을 비롯하여 궁내부 전무(電務)기사와 평민도 있었다. 영어 통역을 맡았던 사람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규식이었다. 일­영 통역은 히시다(菱田靜治) 박사가 맡았다. 한­영 통역을 맡은 마에마(前間恭作)는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외교관으로 조선의 판본(板本)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다. 재판은 3일 동안 열렸다. 4일째인 6월 18일 판사 보온은 베델에게 3주일간의 금고형을 선고하였다. 또한, 복역 후 6개월간 근신을 서약해야 하며, 350파운드의 보증금(피고 200 파운드, 보증인 150 파운드)을 납부하라고 판결하였다. 판사는 문제된 논설 3건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하여 봉기하도록 선동한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므로 앞으로 베델이 계속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판결 결과가 알려지자 재판정 밖의 많은 한국인들은 실망하고 격분하였다. 어떤 사람은 돈 4천환을 가지고 와서 베델의 금고형을 돈으로 대신 면제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말했고, 변호인 크로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제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베델은 3주일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기 위해 영국 군함에 실려 상하이로 가서 주어진 기간을 채워야 했다. 베델의 상하이 도착 소식을 들은 상하이 거주 한국인들은 연일 면회를 왔다. 형무소 당국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재소자들의 면회마저 금지시켰다. 감옥의 3주간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한없이 느리게 갔다. 출옥한 날은 7월 11일이었다. 베델이 상하이에서 복역하는 동안에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와 그 관련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탄압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것은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한 사건이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의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던 양기탁을 1908년 7월 12일 밤에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대한매일신보의 제작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의 중심 기관을 와해시켜 버린다는 이중효과를 노렸다. 그러자 영국 총영사관은 통감부를 향해서 양기탁 구속을 강력하게 항의하고 석방을 요구하여 영국 총영사관과 통감부의 긴장이 고조되고 갈등이 야기되었다. 양기탁의 구속은 베델 재판에 증언한 양기탁에 대한 보복이라고 코번은 주장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의 운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을 구속하여 영국인의 신문경영 업무를 방해했다는 것이었다. 


3) 총무 양기탁 구속과 영일 갈등 

통감부는 양기탁을 구속하면서 내심으로는 베델이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베델은 심리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느꼈을 뿐 아니라 그의 명예도 크게 손상되었다. 양기탁 처리문제로 야기된 영ㆍ일 양국의 외교 갈등에서 코번은 통감부의 미우라를 상대로 더 이상 외교교섭을 벌이지 않겠다는 기피선언까지 하는 최악의 단계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양기탁의 구속에서 그의 신병처리, 재판에 이르는 과정에 영국과 일본이 감정대립으로 치닫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공판은 8월 31일에 처음 시작되어 9월 29일까지 다섯 차례가 열렸다. 일본은 전년도에 체결한 한일협약(1907. 7. 24.) 및 「한일협약 규정 실행에 관한 각서」에 따라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1908년 8월 1일부터 3심제로 된 새로운 재판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재판은 일본인 판사 2명과 한국인 판사 1명이 공동으로 진행했고, 한국인 변호사 2명이 변론을 맡았다. 일본인 재판장 요코다(橫田定雄), 판사 후카자와(深澤新一郎), 한국인 판사 유동작, 일본인 검사 이토(伊藤德純), 한국인 변호사 2명(옥동규, 이용상)이 참여하였다. 이 재판도 베델 재판처럼 한국 재판사상 하나의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피고는 한국인이었으나 증인으로 출두한 사람은 영국인(베델), 프랑스인(마르땡), 재판에 출두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인 콜브란이 선서 구술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모두 다섯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재판에 관련되었다. 사건은 재판부가 양기탁의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양기탁 사건의 와중에 베델은 일본 언론의 집중공격에 시달렸다. 베델은 양기탁이 구속되기 하루 전인 7월 11일 상해에서 3주일간의 금고형을 마쳤다. 금고형이 끝나는 동시에 6개월간의 근신을 보증해야 되었으므로 350파운드(본인이 200파운드, 보증인이 150파운드)를 공탁한 뒤 서울로 돌아온 날은 7월 17일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한국의 친일신문과 일본 언론들은 양기탁과 베델이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기사를 무차별적으로 썼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무고함을 해명도 하고, 국채보상금총합소에서도 의연금의 내역을 밝혔다. 하지만 베델은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베델의 명예를 치명적으로 훼손한 것은 일본 특파원이 서울에서 동경으로 보낸 짧은 기사였다. 베델이 국채보상금 횡령 사실을 자백했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흘린 사실무근의 이 기사는 일본을 거쳐 중국 및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널리 퍼뜨려졌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대표적인 영어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이하 NC 데일리 뉴스)가 도쿄발 기사로 양기탁 재판이 열리기 하루 전날인 8월 31일자에 게재하였다. 같은 신문이 발행하는 자매지 노스 차이나 헤럴드(NC 헤럴드)는 주간이었으므로 똑같은 기사를 9월 5일자에 게재하였다. 


4) 명예회복과 손해배상 소송

베델은 이 기사에 대해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①신문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명예를 회복을 하겠다는 방법과, ②법적인 절차를 밟아 자신의 결백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동시에 금전적인 보상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우선 베델은 고베에서 발행되는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자신을 중상하는 일본 신문들의 기사가 허위라는 글을 보냈다. 베델은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글을 기고하는 동시에 상해 옥중기 「내게 내려진 3주일간의 금고형」을 같은 신문에 연재하여(9월 3일부터 24일까지 4회) 자신의 명예손상을 막아보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2차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6월 1일부터는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발행을 중단했기 때문에 영문으로 쓴 옥중기를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베델은 여론을 통한 명예회복과 함께 법적인 절차를 밟아 NC 데일리 뉴스와 그 자매지 NC 헤럴드를 상해에 있는 영국 고등법원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NC 데일리 뉴스는 상해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가장 권위 있는 영어신문이었다. 베델이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NC 데일리 뉴스도 그대로 버티고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9월 19일자 지면에 동경의 특파원이 보내온 문제의 기사는 특파원이 현장 취재를 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기 때문에 정확하지 못했다면서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정정기사를 실었다. 10월 1일에는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이사회 회장 명의로 베델에게 사과와 함께 타협을 요청하는 편지를 서울로 보냈다. 그러나 베델은 통감부의 탄압과 일본 언론의 집중공격에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더구나 일본의 재판관이 양기탁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이상 베델이 국채보상금을 횡령했을 것이라는 한국의 친일지와 일본 언론의 기사는 근거 없다는 사실이 자동적으로 판명된 셈이었다. 베델은 어떤 타협에도 응하지 않고 NC 데일리 뉴스와 법정에서 맞설 태세였다. 재판은 12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상해의 영국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재판장은 6개월 전에 베델을 재판하기 위해 서울에 갔던 판사 보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베델이 피고가 아니라 원고였다. 판결은 베델의 승소였다.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들은 5명의 배심원들은 베델이 영국의 평균적인 선량한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하고 NC 데일리 뉴스가 그의 명예훼손에 대해서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고 평결하였다. 베델이 NC 데일리 뉴스로부터 받아낸 보상금은 3,000달러(멕시코 은화)였다. 


한국 땅 양화진에 잠든 항일 언론인 


베델은 1909년 5월 1일 37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의학적인 사인은 심장확장이었으나, 그 전 해에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재판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양기탁 재판 때의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받은 일 등의 긴장이 겹쳐 건강을 크게 해친 것이 복합적인 원인이었다. 베델의 죽음에 대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베델은 한국인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뜻을 영원히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은 이듬해인 1910년 4월에 조용히 시작되었다. 모금을 알리는 아무런 광고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멀리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교포들의 성금 89환 60전이 신문사에 들어오면서 모금이 본격화 되었다. 5월 10일에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대한매일신보사에서 함께 일했던 인물들과 각지의 이름 모를 독자들이 1환, 2환 또는 몇 십전씩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모금은 8월까지 이어졌다. 하와이의 ‘국민회’ 서기 한범태는 10월에 10전을 황성신문사로 보내기도 하였다. 짧지만 정의로웠던 베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베델이 죽은 지 1년 뒤인 1910년 6월, 비석이 완성되었다. 앞면에는 한자로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베델의 묘’라 쓰고 뒷면은 당대의 논객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새긴 한국식 비석이었다. 


“아 !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 공(公)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먹을 휘둘러서 이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公)의 공다운 점이요 또한 뜻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원문은 한문) 


이렇게 시작된 비문에는 베델의 약력과 그가 재산을 털어 신문의 운영에 보태면서도 “용왕매진하여 감히 기휘(忌諱: 꺼리거나 두려워 피함)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분분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고 썼다. 장지연이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명논설 「이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를 실었다가 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에 대한매일신보가 그의 옥중 동정을 보도하고 장지연의 기개를 높이 찬양했던 사실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 장지연이 베델을 위해 비명(碑銘)을 쓴 것이다. 장지연은 이렇게 끝맺었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 지로다.” 


베델은 죽은 후에도 일제의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제는 이미 새겨진 비문을 깎아 없애는 옹졸한 짓을 저질렀다. 편집인협회가 전국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작은 비석 하나를 더 세운 때는 1964년 4월 ‘신문의 날’이었다. 서예가 김응현의 글씨를 받아 깎인 비문을 복원하였다. 상처는 남아 있지만 오히려 후세에 말 없는 교훈을 던지는 비석이 서게 된 내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