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루이스 쇼 1880 ~ 1943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공적개요 :
  • 중국 안동현 소재 이륭양행에 임시정부의 교통사무국 설치토록 하여 통신연락, 군자금 모집 활동 지원
  • 자신 소유의 증기선을 이용, 독립운동가의 무기, 출판물, 자금운송 지원
  • 일제에 체포, 내란죄로 기소(4월 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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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쇼는 누구인가? 


쇼는 1880년 1월 25일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의 파고다 아일랜드(Pagoda Island)에서 아버지인 영국 아일랜드계의 사무엘 루이스 쇼(Samuel Lewis Shaw)와 어머니 일본인 엘렌 오씨(Ellen Oh’sea)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0대 초반에 선원으로 동양을 방문한 뒤 줄곧 마카오․인도․중국 등지에서 무역업에 종사했으며, 1868년부터 파고다 아일랜드에 정착해서 무역 화물의 손해정도 및 원인을 검사하는 해사검정인으로 활동하였다. 쇼의 어머니 엘렌 오씨는 아일랜드 풍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친손자들도 아일랜드인 혹은 스페인계 아일랜드 인으로 착각했으며, 일본 정보 당국도 중국인으로 파악했을 정도였다. 오씨는 1879년 12월 22세의 나이로 무역업을 하던 자신의 오빠 소개로 푸저우에서 결혼하였다. 그렇다면 쇼는 어떻게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그는 20대 초반인 1900년경 한국의 금광에서 회계로 근무하면서 한국을 처음 방문하였다. 당시 그의 부친 사무엘이 사업상 곤경에 처했는데, 책임감이 강했던 장남 쇼가 가족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줄 요량으로 한국 근무를 자처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는 아마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모험심과 사업 재능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가 근무했던 광산은 평안남도 은산금광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06년에 은산금광은 가장 많이 생산되었던 광맥이 단절되면서 채산성이 맞지 않아 결국 작업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1907년경 쇼는 중국 안동현으로 옮겨 영국조계에 위치한 현재 단동시(丹東市) 원보구(元寶區) 흥륭가(興隆街) 25호에 무역회사 겸 선박대리점인 이륭양행을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1912년 6월 일본인 사이토 후미(齊藤ふみ)와 결혼했고, 사무엘(Samuel George Shaw)과 루이스(Lewis Shaw) 등 두 아들을 낳았다. 둘째 아들 루이스도 역시 일본인과 결혼하였다. 이처럼 쇼는 자신은 물론 부친과 아들 삼대에 걸쳐 일본인을 아내로 맞이했던 친일적인 가족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쇼가 ‘친일(親日)’은커녕 ‘반일(反日)’적인 한국독립운동에 적극 관여하였다. 그 이유는 쇼가 사업상 일본과 경쟁해야 했던 상황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안동에서 약 5만 평의 광대한 토지의 영구임대권을 얻어 제재공장을 운영함과 동시에 기선회사를 만들어 운송업·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쇼를 시기하면서 그를 축출하려고 공작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쇼는 영국의 극동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상해상공회의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중국에 있던 영국 상인들은 일제의 방해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대체로 반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쇼 역시 1914년경 상해에서 일본상품배척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일본인과 사업상 거래하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였다. 이처럼 강렬한 반일감정을 지녔던 쇼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아일랜드 출신으로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쇼가 “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소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인 바, 다수의 한국인 지기들로부터 그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를 받았을 때는 적당한 조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고 공언한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삼대에 걸쳐 일본인을 처가로 둔 쇼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애정과 호의는 단순히 한국의 독립 혹은 해방운동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와 정의, 그리고 세계 평화와 공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쇼, 조선총독이 직접 체포를 지시하다 


쇼가 언제부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3․1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신변의 안전을 무릅쓰고 이륭양행 내에 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이전부터 임정의 요인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아왔음을 잘 보여준다. 단적으로 3․1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지는 상황에서 김구가 동지들과 함께 안동에서 이륭양행의 선박 계림호를 타고 상해로 건너갔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김구 뿐 아니라 국내와 상해를 오고갔던 독립운동가들 중 이륭양행 소유의 선박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보호․지원해주었던 것이다.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락을 활발하게 취하기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곧이어 국내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지인 안동에 안동교통지부교통국(1919년 10월 17일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개칭)을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그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6월 1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통신 및 연락기관원으로 이륭양행 등지에 파견했던 김취곤(金聚坤)이 체포된 사실 등으로 미루어 최소한 1919년 5월 중에 이미 임시정부에서 이륭양행으로 파견된 통신원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동교통지부는 조지 엘 쇼가 운영했던 구시가 흥륭가 소재의 이륭양행 2층에 자리잡았다. 조직은 국장이 관할하는 금전모집과․통신과․인물소개과가 있었으며, 그 아래 교통소를 두었다. 안동교통지부는 애초에 국내 각 군과 면에 교통국과 교통소를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10월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관할구역도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 국한되었다. 뒤에는 만주지방의 통신업무도 관장했는데, 이를 통신국으로 불렀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정부의 자금모집, 국내의 정보수집 보고, 정부 지령․서류의 국내 전달, 교통국의 조직 및 독립운동을 위한 인물 소개와 연락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한글활자․한국지도․무기․탄약 등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쇼의 협조 아래 안전하게 운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에 모두 쇼가 직접 관여했다고 할 수 없지만, 이륭양행이 일본영사관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했던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점을 활용해서 적극 지원해주었던 점만은 확실하다. 이는 일제가 이륭양행을 임시정부와 국내․만주지역을 연결해주는 안전통로이자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새’ 혹은 ‘국내전진기지’로서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로 말미암아 쇼는 안동의 일본영사관과 경찰서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에게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져 줄곧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7월 11일 쇼가 일본에서 오는 처자를 맞이하기 위해 안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갔을 때, 일본영사관 및 경찰서․신의주경찰서․총독부 경무국은 독립운동을 근절시킬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계획적으로 그를 체포하였다. 일제 측은 표면상 쇼가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것을 우연히 검문해서 체포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쇼는 여름방학마다 처자를 맞이하러 국내로 들어왔으며, 이 사실을 일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사재판권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안동주재 일본영사관 이리에(入江正太郞) 영사가 쇼의 체포에 관여․동의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리에 영사 스스로도 자신의 행위가 뒷날 외교문제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치다(內田康哉) 외무대신에게 직접 “이 기회를 놓치면 도저히 쇼의 죄상에 관해 철저하게 취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서 이에 동의했던 사정이 있다”고 자인한 뒤, “만일 쇼가 무죄라고 할 경우 정책상 달갑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해서 대외적으로 본관이 전혀 쇼 체포를 알지 못했다는 점을 당돌하게 다짐해두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처럼 치외법권의 대상인 쇼 체포는 법률상 하자가 있었을 뿐 아니라 영국의 반발을 살 것이 뻔했기 때문에, 신의주경찰서장 등은 임시 구치장을 특별히 설치하였으며, 7월 12일 이 사건을 신속하게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데 이어 쇼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경무국장은 조선총독부의 사이토(齋藤實) 총독에게도 쇼 체포 상황을 보고하였고, 총독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당일 이를 우치다 외무대신에게 알렸다. 그러나 총독부 등 관계 기관 내에서도 이를 둘러싸고 찬반 격론이 벌어졌다. 경무국장은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반면, 사법국검사장은 법률적으로 무리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외국에 관계된 일이어서 미즈노(水野錬太郞) 정무총감도 감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사이토 총독이 간단하게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지 않느냐”고 말함으로써 경무국장의 의견대로 쇼를 구속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처럼 쇼의 구속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의 핵심 관료들이 협의하였고, 경무국장과 검사장의 찬반양론이 팽팽한 가운데 최종적으로 결정한 자는 바로 사이토 총독이었던 것이다. 


총독부와 달리 일본 외무성은 처음에 쇼의 체포․구속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치다 외무대신은 사이토 총독에게 주일 영국대사가 7월 14일 외무차관을 방문해서 쇼의 체포 이유를 물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면서 “만일 확실한 죄상이라고 누구라도 수긍할 수 없을 시에는 일본관헌은 비난의 소리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여기에는 쇼의 범죄행위를 철저하게 조사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보다 쇼 체포의 법적 근거가 빈약하며 이로 말미암아 영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이미 쇼를 체포할 때 구속하기로 결정했던 만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를 내란죄로 기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쇼에 대한 재판을 담당한 경성고등법원 검사장은 쇼 체포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활동을 발본색원할 ‘가장 좋은 기회’로 삼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을 포함해 국무원총리 이동휘, 내무부장 이동녕,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 임시정부의 각료 전부 및 무장독립운동단체의 주요인물 모두와 엮어 그를 내란죄로 기소하였다. 쇼는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는 임정의 방침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이륭양행 내에 임시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제공하거나 자신의 기선을 제공해서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해줌으로써 내란행위를 방조했던 죄를 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외무성을 포함한 일본 내각이 우려했던 대로 영국 정부와 국회, 그리고 언론은 쇼 체포를 극동지역 거주 영국인의 지위 및 위신에 관한 문제로 매우 중대시해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외무성은 일본의 법률에 의거해서 쇼를 체포․구치시킨 것은 적법한 처분임을 영국 측에 이해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쇼가 서울로 이송되어 내란죄로 기소되자 중국거류 구미인들은 매우 격앙된 분위기였다. 쇼 사건은 중국에서 이권 확장에 여념이 없었던 구미 열강의 영사재판권 행사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쇼 사건은 중국내 영자신문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특파원들에 의해 영국의《런던 타임즈(London Times)》등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갔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수뇌부는 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절충을 시도하는 동시에 직접 조선총독 등을 설득하는 데 나섰다. 결국 쇼 문제는 총리․외상․총독․해상이 협의하는 형태로 확대되었으며, 어떻게든 흐지부지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졌다. 문제는 일본에서 일단 체포한 자를 석방하는 방법이 보석 아니면 무죄판결 밖에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무죄석방은 일본의 전면적인 부담이 되므로 판단을 유보해두고 보석으로 석방하는 방법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는 쇼를 안동현에서 퇴거시킨다는 단서가 붙었다. 


영국정부도 쇼를 무조건 석방하라고 강경하게 일본정부에 요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을 조속히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쇼에게 보석 신청을 권고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점을 간파한 일본은 쇼 사건에 관해 법률상의 문제에 전혀 접촉하지 않은 채 주로 영일동맹의 우의를 중시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원만한 보석으로 ‘사실상의 해결’을 보자고 영국 측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경성고등법원 예심판사는 쇼가 제출한 보석원에 대해 11월 4일 보증금 1500원을 내도록 해서 보석을 허가하기로 결정했으며, 11월 19일 쇼는 보석으로 석방되어 4개월여 만에 안동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영국은 쇼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보증금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는 실제로 보석의 취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조건석방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일본정부는 당황하여 일단은 거절했지만, 이미 보석으로 쇼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방침을 정했기 때문에 쇼가 체포․구속으로 말미암아 입은 손실을 보상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정부에 보증금에 상당한 금액을 되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형식적으로도 보석 보증금을 쇼 본인에게 반환해달라고 요구하였고, 이에 굴복한 일본정부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일본정부가 그토록 자국의 체면을 손상시켜가면서까지 보석 보증금 반환에 집착했던 이유는 법률상으로 석방과 보석은 그 성격이 전연 다르다는 점을 내세워 쇼 사건이 여전히 재판 중이라는 명분을 획득함으로써 국내외의 비난과 반발을 무마시킴과 동시에 쇼의 한국독립운동 지원활동에 조금이나마 제약을 가하려는 데 있었다. 결국 쇼가 보석으로 풀려난 지 3년이 지난 1924년 3월 7일 일본정부는 쇼에 대한 공소를 취소함으로써 그의 체포․기소를 둘러싼 문제는 마무리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쇼의 체포와 석방 과정에서 반일감정이 확산됨과 동시에 일제의 한국지배에 대한 부당성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한국민의 독립운동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쇼는 옥고를 치루고 석방된 후에도 이륭양행의 사무원 김문규에게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독립에 호의적인 입장을 여전히 견지하였다. 


쇼, 일제의 탄압 ․ 축출공작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다 


1920년 11월 19일 쇼는 석방되어 안동으로 돌아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다음날 만찬회에서 쇼는 일제의 체포·구속에 결코 위축되지 않은 채 앞으로도 정의를 위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원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해 말 쇼는 일본 요코하마․도쿄로 건너가 두 아들을 중국 푸저우로 보내 신변의 안전을 꾀했으며, 주일 영국대사관을 방문해 구속으로 발생한 손해 배상 건을 협의하였다. 이어 1921년 1월 26일 쇼는 상해로 가서 이승만․안창호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마련한 환영연에 참석해 금색공로장을 받았으며, 안동교통사무국의 재흥 등 장래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그는 일제에 의해 구속된 자신을 비방했던 상해 「원동시보(遠東時報)」의 발행자와 기자를 상대로 명예훼손 손해배상을 미국영사관 법정에 청구하였다. 1921년 5월 중순경 약 4개월 만에 안동으로 돌아온 쇼는 겉으로 한국인과 관계를 끊고 근신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로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해서 안동교통사무국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힘썼다. 봉천(오늘날 심양) 주재 영국영사가 이륭양행 내 독립운동가들의 잠복 여부를 조사하러 왔을 때에도 쇼는 기지를 발휘해 그의 의심을 풀어준 적도 있었다. 아울러 쇼는 압록강 입구의 대동구 부근 토지를 장기 임대하는 등 안동지역에서 사업을 확장시키면서 일본인 사업가들과 경쟁을 펼쳤다. 1922년 8월 일제의 김문규 체포로 안동교통사무국이 크게 위축되었음에도, 1923년 2월 중순 쇼는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김구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자신이 카라한을 방문해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겠다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를 도모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그는 일본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재만 독립운동가들을 비호하고 동만주 및 상해간 독립운동가들의 교섭을 개시할 계획도 갖고 있었으며, 불․일 양국의 불화를 강조해 한국인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와 같이 쇼가 여전히 반일운동을 벌이자, 일제는 쇼를 안동에서 축출하려는 공작을 펼쳤다. 1922년 말부터 1923년 초에 걸쳐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스즈키(鈴木)가 나고야(名古屋)에 거주하는 쇼의 처 후미의 오빠 사이토를 통해 나고야시회의 의원 등을 부추긴 뒤 이륭양행을 매수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스즈키는 안동으로 가서 매수 방안을 제시했지만, 쇼의 강력한 거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924년 초 쇼는 안동에 영국인과 공동으로 대규모 제사(製絲)회사를 설립하려고 시도한 듯하다. 이 소문이 떠돌자 안동의 일본인들이 커다란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걱정할 정도로, 외국인 중 유일한 경쟁자이자 반일적 성향을 띤 쇼는 일본인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1925년에 쇼는 자기 소유의 태륭호(泰隆號)와 일본 대련(大連)기선주식회사 사이츠마루(済通丸)의 충돌사건으로 일본인과 마찰을 빚었다. 쇼는 기선주식회사 측에 그 책임을 물어 손해보상을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일본영사는 일본선박의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태륭호의 선원 중 중국인 무자격자가 있는 약점을 꼬투리 잡아 사건을 무마함으로써 쇼에게 타격을 가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본 측의 대응방식은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쇼에 대한 탄압․축출공작의 전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편 쇼는 석방 후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함과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안동을 왕래할 때 자신의 선박을 보내 안전을 도모함으로써 안동교통사무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결과 안동교통사무국은 독립운동가의 운송․보호 및 소개에 전력할 수 있었다. 이륭양행 내 안동교통사무국과 대한청년단연합회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연합회가 김문규에게 소개해 이륭양행에 머물렀던 최준․오인석 등은 안동우체국에 수신함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은닉처를 제공하였다. 이륭양행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사를 도모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보관․전달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만주 지역 독립단체들 간의 비밀 통신 및 정보 수집, 각종 임시정부 관련 책자 및 홍보물 전달 등 통신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통신은 일단 개봉한 후 그 봉투를 바꾸어 각각 발신하고, 인쇄물은 국내 또는 서간도 방면으로 배포되었다. 이륭양행 앞으로 발송된 인쇄물에는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독립신문 등을 비롯해서 각종 독립운동단체가 보낸 「중한협회선언서(中韓協會宣言書)」 등이 있었다. 또한 김문규는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동의 재산가들에게 독립공채를 팔려고 했으나 실패한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문규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보안의 정도가 낮은 독립신문 등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임시정부 내에서 일본의 밀정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쇼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안동교통사무국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922년 8월 일제는 김문규를 체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는 이 사건에 매우 분개하면서 외교문제로 삼는 동시에 김문규를 보석으로 석방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였고, 쇼의 처 후미 역시 김문규의 부친에게 가족의 보호를 보장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주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중국 측도 이 사건을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인도와 당사자의 처벌 및 사죄를 요구하는 항의서를 일본영사에게 보냈다. 김문규의 체포로 이륭양행을 거점으로 삼은 안동교통사무국은 실질상 해체되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후 이륭양행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음에도,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쇼의 지원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쇼는 이륭양행에 거주하는 강경성 등을 안전하게 도피시키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은닉해주었다. 또 1923년 의열단의 김시현 등은 국내 거사계획을 추진하면서 이륭양행을 이용했고, 임시정부 요원들은 이륭양행의 선박으로 폭탄 등의 무기를 운반한 뒤 통의부․정의부 등의 독립운동단체들과 연락하면서 무기와 탄약을 운송하였다. 1924년 초에 쇼는 통의부가 이륭양행에 파견한 특파원 박창열 등의 부탁을 받아들여 국내 진입용 모젤권총을 구입해주었다. 


그 후 1931년 만주침략을 계기로 쇼에 대한 일제의 탄압․축출공작이 전개될 때까지 쇼가 어떻게 한국독립운동과 연관을 맺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쇼는 임시정부의 활동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자신 역시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을 자제한 채 사업을 운영하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1924년 4월 만기 출옥한 김문규를 다시 이륭양행의 직원으로 고용한 점, 1925년 5월경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이륭양행에 근무했던 김승빈이 모종의 사명을 띠고 서울로 갔던 점 등으로 미루어, 쇼가 어떤 식으로든 한국독립운동을 도와주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만주침략을 계기로 일제는 쇼를 탄압하기 위해, 압록강의 국경지역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이륭양행의 기선들을 불법 임검하였다. 심지어 일제는 선장을 폭행하고, 쇼와 그의 부인에게도 체포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이륭양행이 대대적으로 밀수에 종사하고 있다는 등 중상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쇼는 직접 혹은 영국총영사 등을 통해 일제 측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일본외무성은 영국과의 마찰을 우려해서 단속을 자제해달라고 조선총독부에 요구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치안유지를 이유로 이를 거부하면서 만주측 관헌을 앞세워 공동 임검하는 편법으로 비난을 모면하고자 하였다. 


만주침략 1주년을 전후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신의주수비대가 특별경계의 미명으로 선박에 대한 야간통행 금지와 주간 임검 강화를 결정하자, 쇼는 그에 따른 손해배상을 요구하겠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안동영사관 측의 임검 자제 요청을 거절했지만, 야간통행 금지시간을 단축하되 임검 시 반드시 만주국․관동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외무성 역시 철교를 보호하기 위해 수비대가 선박을 임검해야 한다는 육군성과 조선총독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필요성을 외국선박업자에게 통보하라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외무성이 영국과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형식상 조선총독부에 협조를 요망했지만, 실질상 임검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일제는 대안기선공사 설립과 이륭양행 매수공작을 통해 쇼를 안동에서 축출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국제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는 쇼의 압록강 항로권을 무효화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대안기선공사에 상당한 보조금을 제공하여 이륭양행과 경쟁토록 했던 것이다. 대안기선공사는 일본영사관․만주국정부가 배후에서 후원하고 군부가 한국독립운동가 단속을 강화할 의도로 1934년 3월에 설립한 반관반민의 어용회사였다. 대안기선공사는 이륭양행을 매수하려고 시도함과 동시에 야비하게도 쇼의 창고부두 바로 앞에 계선장을 건설하였다. 안동영사조차 쇼가 너무 노골적인 간섭․압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처럼 쇼를 ‘박멸’하려는 졸렬한 조치는 더욱더 반감을 조장하고 격심한 경쟁을 초래할 것이므로 계선장을 이전하자는 의견을 내놓을 정도였다. 쇼는 영국총영사를 통해 종래의 관행 및 쇼의 특권을 저해하는 계선장을 즉각 이전해달라고 요구함과 아울러 선박 구입․가격 인하․경품 제공 등으로 격렬하게 맞섰다. 이로 말미암아 대안기선공사는 경영 곤란으로 교통부에 적극적인 원조를 요구했지만, 쇼도 커다란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따라서 쇼는 대안기선공사의 잔교 위치 이동을 전제로 최저운임 협정 혹은 이륭양행 기선 매도를 협의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이륭양행과 대안기선공사의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만주국은 정세를 관망하면서 쇼와 계속 경쟁할 것, 잔교를 이전하지 말 것, 재정부가 대안기선공사의 결손을 이해하고 보전해줄 것 등을 결의하였다. 아울러 안동영사로 하여금 이륭양행의 권리와 선박에 대한 매수를 알선하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되었다. 쇼도 더 이상 손실을 감수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1935년 2월 대안기선공사에 이륭양행의 선박․이권 및 안동 삼도랑두․대동구의 재산 전부를 매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이륭양행과 대안기선공사 간의 대립․경쟁은 일제의 의도대로 일단락됨으로써 쇼의 입지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쇼는 안동과 상해 간의 운송업에 전념했는데, 일제는 이 사업마저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반만(反滿)․항일의 상징적 인물인 쇼를 안동에서 완전히 축출하려는 공작을 펼쳤다. 일제는 이륭양행이 만주국의 국책 사업인 노동자 수송에 관여할 수 없도록 안동항로동맹회를 결성하고 그에 가맹한 선박업자만 참여하라고 획책하였다. 이에 쇼는 영국총영사로 하여금 일제 측에 항의하도록 요청함과 동시에 운임을 파격적으로 낮추어 안동에서 만주를 떠나는 노동자의 대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만주국 측은 관동군 교통감독부원과 관동국 주임 등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리하여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9월 일제는 쇼의 장남 사무엘이 불법으로 신우호에 탑승했다는 꼬투리를 잡아 선박을 억류하고 쇼의 처․영국인선장 등을 소환․취조함으로써 쇼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쇼는 그 부당성을 영국총영사에게 호소하면서 신우호의 석방을 요청하였다. 만주국측은 사무엘의 밀항 자체는 비교적 경미한 규칙위반이며 선박을 몰수 처분한 전례도 없다고 자인한 다음, 약 2주간에 걸친 선박억류로 쇼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판단 아래, 시말서를 받는 선에서 신우호를 석방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압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1938년 압록강 해빙 후 쇼는 압록강의 삼도랑두와 안동 간의 화물운송업에 새로 진출하는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자신의 처를 내세워 일본인을 고용하고, 화물운임협정조합인 동항회에 대항해서 운임의 가격을 낮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항회가 이륭양행 고객의 화물을 인수하지 않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오히려 쇼는 막대한 타격을 입고 경영난에 봉착하였다. 결국 쇼는 도저히 안동에서 활동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1938년 4월 안동을 떠나 푸저우에 이륭양행의 본점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5월 3일 영국총영사에게 정식으로 영업신고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31여 년간 안동에서 쇼가 일제의 온갖 탄압에 굴하지 않은 채 전개했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반일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가 그토록 감시․압박하면서 축출하려고 애썼던 안동의 ‘트러블 메이커’이자 목구멍의 가시였던 쇼의 안동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쇼는 푸저우에서도 석유 판매 등 사업을 벌였으나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적지 않은 압박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3년 11월 13일 쇼는 63세로 푸저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푸저우에는 쇼가 태어났던 푸저우의 집은 공원으로 바뀌었고,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혔던 무덤은 중국 문화혁명 때 파헤쳐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인류의 자유와 정의, 평화를 지향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주었던 쇼의 정신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