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 1889 ~ 1970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공적개요 :
  • 캐나다 출신 의학자이자 선교사
  •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
  • 1919년 일제의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 현장을 촬영해 국제적 반일 여론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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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코필드 장안 3·1독립운동 기념비경기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6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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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 1889~1970)는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을 때, 이 거사가 일어나기 직전에 이 거사에 대해서 통보받고 협력을 요청받았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저녁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이 그를 찾아와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며, 다음 날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고 그 독립선언문의 사본을 영어로 번역하여 최대한 빨리 미국 백악관에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3월 1일 오전에도 그를 다시 찾아와 그날 오후에 파고다공원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있을 것인데 그곳에 오후 2시까지 와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스코필드는 기꺼이 사진기를 들고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 만세시위현장의 사진을 찍어 3․1운동의 실상을 증거 사진과 함께 해외에 알렸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3·1운동 초기의 몇 안 되는 사진들은 모두 그가 찍은 것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사진과 기록으로 남기며, 일제의 비인도적 한국인 탄압에 맞서 일본인 고관들을 찾아가 항의하고, 언론에 투고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내한과 3․1운동의 증인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럭비(Rugby)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라 고등학교 과정까지 영국에서 마치고,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 1907년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Ontario) 수의과 대학에 들어가 세균학을 전공했다. 1911년 그 대학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고, 1913년 피아노를 전공한 앨리스(Alice)와 결혼했다. 1914년부터 모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했다. 그러던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O. R. Avison)의 초청과 권고로 한국에 선교사로 온 것이다. 그는 그 때부터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하에 있던 한국인을 마음으로부터 동정하고, 사랑하였다. 그는 3․1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1919년 4월 15일에 일어난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 현장에도 몸소 찾아가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있었던 일제의 만행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다. 수촌리는 3월 말 4월 초 수원지역(현재 화성지역)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4월 6일 새벽에 마을에 들어와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불을 끄려는 사람들을 총칼로 제지하여 한 사람이 죽고 여러 사람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제암리는 발안 장날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오후 일본 군경이 마을에 들어가 15세 이상 남자를 예배당에 모으고,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불태워 부녀자 2명을 포함한 23명을 학살하고 이웃 고주리에서 천도교인 6명을 더 총살한 사건이다. 4월 17일 제암리교회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바로 다음 날인 18일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와 팔이 불편한 몸으로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고 9시 열차편으로 수원까지 가서 다시 자전거로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 조사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수촌리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도와주었다. 이 때 스코필드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 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 1919년 5월 27일자에 서울 주재 익명의 특별통신원(Special Correspondent)이 4월 25일 보내온 기사로 실렸다. 같은 무렵 작성한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비밀리에 해외로 보내져 미국에서 발행되던 장로회 기관지 Presbyterian Witness 1919년 7월 26일자에 실렸다. 


1919년 5월 총독부 기관지나 다름없는 영자신문 서울프레스가 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보도하자, 스코필드는 이를 비판하고, 직접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옥고를 치르고 있던 노경순을 면회하였다. 그리고 감옥 형편을 살피기 위해 형무소 당국에 강청하여 노경순이 수감되어 있던 여자감방 8호실까지 돌아보고 함께 수감되어 있던 유관순, 어윤희 등을 만나 위로하였다. 그가 총독부 고위 당국자를 직접 찾아가 감옥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고문과 비인도적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그 후에도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들을 조사하여 영국의 성서공회 총무 리슨(Ritson)을 거쳐 토론토의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에게 보냈다. 이것은 다시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 보내져 거기서 1919년 7월에 발행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증거자료로 실렸다. 그가 찍은 사진 필름은 상해 밀사 정환범(鄭桓範)을 통해 상해임시정부에도 전해져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일부가 실리고, 영문 사진첩 한국 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1919)에 실렸다. 특히, 그가 찍은 태형 피해자 사진을 비롯한 일제의 만행 피해자 사진은 서울주재 미국총영사 베르그홀쯔(Leo Bergholz)에게도 전해져 1919년 7월 17일자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었다. 그는 그 해 8월 한국선교사 대표로 일본으로 건너가 극동의 선교사 8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고, 하라 수상을 비롯한 일제의 요인들을 면담하여 일제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라 수상은 1919년 8월 29일자 그의 일기에 스코필드를 만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선교사 캐나다인 스코필드(Schofield) 내방. 조선 사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을 말하므로 나는 금후의 방침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다만, 그는 아무리 하여도 조선은 자치를 허락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 설에 반대하여 이를 설파하고, 우선 장래를 보자고 설시(說示)하여 그는 이해하고 갔다(내가 면회 전에 야마타[山田] 비서관과의 대화에서 미루어 보건데 조선에 있는 선교사는 소동을 선동하고 있음이 틀림없고, 그리고 그 가까운 원인은 육군 군인 등이 전시[戰時] 독일을 칭찬하고 있어서 불쾌함을 느껴 기회를 보아 교사[敎唆]로 나오는 듯 한 감이 있다고 한다).”(『原敬日記』 1919년 8월 29일자) 


이 회담에 관한 스코필드의 회고는 캐나다에 돌아가 『글로브(The Globe)』지 1920년 9월 4일자에 실었는데, 여기서 스코필드는 “만약 (일본) 정부가 동화정책을 고집한다면, 결과는 유혈 혁명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일로 일제의 미움을 사 항상 감시와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한국인을 위한 스코필드의 활동을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919년도 말까지의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다른 어떤 선교사보다도 한국인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세브란스 병원의 보고서에서 독립선언에 의해서 일어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름 동안에 그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의 실상을 (일본)관리들에게 직접 설명하기 위하여 도쿄(東京)를 여행했다. 수상을 인터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지도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그 상황을 충분히 토론했다. 그는 가루이자와(輕井澤)와 고템바(御殿場)에서 열린 선교사 회합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일본에 있는 동안 그는 일본에서가 아니면 미국에서라도 곧 출판되기를 바라면서 한국 소요에 관한 책을 한 권 저술하기도 하였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러한 것들이 공개됨으로써 중단되기를 희망하면서’ 현재 행정당국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악행에 관한 일련의 신문 기사들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박사는 고문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하여 총독에게 불려갔다. 당연히 고문과 구타와 악행 등을 다루는 기사들을 경찰들이 매우 싫어하였고, 이것은 일본 경찰이 그 필자(스코필드)를 심하게 공격한 것을 설명해 준다. 어떤 사람은 총독이 스코필드 박사를 ‘교활한 음모자요 굉장히 위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단언했다.”(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 for the Year Ending December 31th, 1919.) 


또한, 그는 3․1운동 이후 일본의 개혁정책에 관하여도 동화정책을 폐기하고 한국인이 원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제도를 바꾸는 피상적인 개혁에 대해서 일일이 그 근거를 들어 비판하였다. 1919년 11월 무렵부터는 일제가 젊은이들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하기 위하여 실시되던 공창제도에 맞서 강연을 통하여 그 폐해를 역설하고, 조선 청년들이 이런 끔찍한 죄악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에는 최두선(崔斗善)을 단장으로 하는 혁청단(革淸團)을 조직하여 공창폐지운동을 이어가게 했다. 이러한 그의 반일적 태도는 선교부에도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어, 1920년 3월에 세브란스 근무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본국인 캐나다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스코필드는 언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이를 개혁하고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행된 글로브(The Globe) 등에 기고한 글에서 일제 고관들의 안일한 한국 상황 인식과 피상적인 개혁을 비판하면서 근본적인 동화정책과 민족차별을 철폐하고, 한국인에 대한 강압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치를 허용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총독부나 일제의 고관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찾아가 일제 군경의 비인도적 만행을 규탄 항의하고, 개혁을 요구하였다. 재팬 애드버타이저 1920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연재되었던 「한국에서의 개혁」은 마침 국내에서 창간된 동아일보 기자가 번역하여 동아일보 1920년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조선통치개량에 대한 외국인의 관찰」이라는 칼럼으로 연재하였다. 스코필드가 일제의 한국에서의 개혁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연재하자, 한국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친일적 선교사 헤론 스미스(Rev. Frank Herron Smith)가 스코필드를 비판하고 일제를 옹호하는 논쟁적인 글을 같은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 때 마침 스코필드는 귀국길에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 기사를 읽고 즉시 반론을 써서 「한국 : 프랭크 헤론 스미스 목사(Rev. Frank Herron Smith)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목으로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기고하여 1920년 4월 10일자에 실렸다. 이것도 동아일보에서 번역하여 1920년 5월 6, 7일자에 실었다. 

스코필드는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연이나 기고를 통하여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일제의 불완전한 개혁을 비판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에 기고한 「조선 발전의 요결」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으로 교육, 근면(노동), 재정(산업), 도덕(정의) 4가지를 들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권고하고 있다. 이러한 권고는 한국 사람들에게 불편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직 절절히 사랑하는 한국 국민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말을 기탄없이 하고자 함에 있다.”고 하여 한국인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17일자에 실린 「조선의 친구여」는 1926년 여름 잠시 한국을 방문하고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쓴 편지로 한국에서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한국의 장래에 관해서 희망이 있다고 격려하고 있다. 용기를 가지고 교육과 실천에 힘쓰며, 근검절약하고 도덕을 숭상하라고 권면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1926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보낸 「나의 경애하는 조선의 형제여」에서도 “조선은 나의 고향과 같이 생각됩니다.”라고 말하고, 1931년 크리스마스에 보낸 「경애하는 조선 형제에게」라는 공개편지에서도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그만큼 한국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한국인을 형제로 생각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해방 후 재 내한과 봉사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해방 후에도 식지 않았다. 1945년 8월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자 한국의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축하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66세로 은퇴하고, 1957년에는 부인 엘리스가 사망했다. 그동안 한국 친구들이 수차례 한국에 돌아올 것을 권했으나, 건강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응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195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전후 복구는 아직 진행 중이었고, 수많은 고아와 실업자들은 넘쳐났으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조선일보 1959년 1월 3일자에 기고한 “민심은 공포에 잠겨있다. 의사당 앞에 무장경관이라니”라는 글은 그가 국회의사당을 무장 경관들이 포위하고, 국민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 것을 보고 1919년 3․1운동 때를 회상하면서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그래도 1919년에는 이런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기보다 위험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런 글을 우리는 썼다. 그런 글의 덕분에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고 나는 믿는다.”고 이 글을 맺고 있다. 그는 그 후 한국에 머물러 서울대 수의과대학 수의병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고아원 두 곳과 직업학교를 지속적으로 돕고, 중고등학생들의 영어성경공부반도 지도하였다. 그러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3․1정신을 이야기하고, 현실사회의 독재와 부정과 악과 거짓을 경계하고 비판하여 정부 당국자들이 한 때 그의 서울대 강의를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한국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끊임없이 바른 소리를 했다. 「의, 용기, 자유의 승리」(동아일보 1960.4.28.)와 「내가 본 한국혁명」(조선일보 1961.1.8.)은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에 대한 평가와 개혁해야 할 과제를 제시한 글이다. 특히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61년 3월호 기독교사상에 기고한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에서는 과거 40년 전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와 1960년대 초 한국 교회를 비교하면서 “그 당시의 교회는 부패하지 않았는데 현재의 한국교회는 부패하였다”고 비판한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이 세상의 인간적인 기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신하는 일과 또 그리스도교적인 신앙, 사랑의 겸손 봉사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부자가 되는 일이 위험하다는 이러한 원칙에서부터 고의적(故意的)으로 벗어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혼란기와 6․25전쟁과 독재정권, 미국 원조물자의 유입 등을 거치면서 교회는 권력과 정부 안에 이권을 추구하는 야심가들의 이용거리가 되어버렸고, 세속적인 부패세력에 침투당하여 영혼에 대한 사명을 망각하여 교회의 능력과 정직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품고 있던 온정과 존경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의 교회를 함부로 비난하지 말고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기도하며 속죄를 받기 위하여 힘써 일하여야 하겠다.”고 권고한다.진정한 민주주의나 건전한 경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코필드는 3․1운동의 산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3․1정신의 전도자였다. 한국에서 거의 해마다 3․1절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언론과 잡지에 3․1운동을 회고하고 3․1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을 것을 권고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1963년 3․1절에 동아일보에 기고한 「1919년 3월 1일과 1963년 3월 1일」, 1966년 The Feel of Korea에 실은 「1919년 3월 1일, 삼일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69년 3․1절에 동아일보에 기고한 「하나로 뭉친 독립만세」와 중앙일보에 기고한 「3․1운동은 한국 정신의 상징」은 모두 그러한 글들이다. 스코필드는 1960년대 후반에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즈의 “현대사조(Thoughts of The Times)” 칼럼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종교와 도덕, 과학과 종교, 무신론적 인본주의, 한국의 추석과 영국의 수확제, 예수의 죽음과 어린 초등학생의 자살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있다. 1968년 3월 1일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69년 초부터 해외 여행 중 심장성 천식이 발작하여 몇 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스코필드는 병상에서도 한국인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1970년 3월 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그의 서거 직후 동아일보 1970년 4월 16일자에 실린 「스코필드 박사 병상 단상록」은 그러한 기록들이다. 특히 조선일보에 실린 짤막한 글에서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이 몇 마디는 내가 오늘의 조선 청년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코필드는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하여 가료를 받다가 1970년 4월 12일 81세로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4월 16일 광복회 주최의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고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신 거룩한 스코필드 박사 여기에 고요히 잠드시다.”라고 새겨져 있다. 스코필드는 그의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하고 즐겨 사용했다. 그 발음이 스코필드와 비슷할 뿐 아니라, 철석같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돌석(石), 호랑이 같은 무서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호랑이 호(虎),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는 도울 필(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한국 이름이 그의 인격과 삶을 요약해주고 있다.